원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단어들이 있다.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대축일 전까지를 이르는 ‘사순(四旬)’이라는 말이 그렇다. 네 번의 열흘이라는 산술적인 단어일 뿐인데도 이 말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비가 상상된다. 습습함, 빗방울 소리, 풀숲의 고요함, 웅덩이 같은 것.
정작 사순 시기의 첫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하며 유혹을 받는 장면이었는데도 미사 시간 내내 나는 정반대의 상상을 하고 있었다. 신부님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이 시기를 씩씩하게, 오히려 기쁘게 지내자고 강론했다. 그 고난 끝에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계신 사막으로 비를 보내는 상상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고난은 단비처럼 내릴 구원의 시초이기도 하니까.
어제는 찬 바람이 불어 몹시 추웠다. 매번 마지막 추위일 거라고 위안했는데 그제는 눈이 펑펑 내렸고 잠깐 스며들던 봄기운은 물러났다. 기다리는 봄도, 탄핵 심판 선고도 이주에는 없었다. 나는 이 겨울이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며 집사람에게 푸념했다.
“너한테 제일 없는 게 인내심이잖아.” 집사람이 콕 집어냈다.
“그렇지, 그런데 이 겨울이 나한테 그걸 가르치네.”
그런데 그 시험은 어떤 시험일까.
재처럼 흩어지는 마음들
소설을 쓰기 위해 중국 농촌 현실의 인류학적 보고서인 《량좡 마을 속의 중국》(마르코폴로, 2025)을 읽었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져온 농촌 사회의 변화를 기록한, 아주 섬세하고 깊은 통찰의 책이다. 한국이 거쳐 온 도시화 과정과 매우 닮아 있었다. 우리 엄마의 삶이 바로 그런 과정의 한 증거일 텐데, 엄마는 시골이 싫었고 절대 같은 마을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스무 살이 되기 전 대도시 공장으로 일을 하러 나갔다. 어려서부터 그런 엄마의 삶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나는 이야기뿐 아니라 어떤 정서까지 엄마로부터 전해 받았다.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은 2010년대를 배경으로 그런 ‘엄마들’이 떠나간 농촌을 소설 같은 생생함과 인물 묘사로 그려 내고 있다. 이런 일화가 있다. 강에 모래 준설선이 나타나 모래를 퍼가기 시작하면서 마을에는 익사자가 급증한다. 자연 하천과 달리 인간의 손이 닿은 강물은 유속이 빨라지고 깊은 웅덩이가 생겨나 소용돌이치며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도시로 돈 벌러 간 부모를 대신해 농촌의 나이 든 노인들이 손주들을 보살피는데 어느 집에서는 네 명의 아이를 한 번에 잃기도 했다. 매년 같은 이유로 사람들이 빠져 죽는 데도 ‘모래 공장’은 멈추지 않는다. 마을의 중요한 수입원이기 때문이다.
자식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아버지 이야기도 등장한다. 사고가 일어나자, 마을 사람들은 가해자와 합의를 보라고 종용한다. 어차피 사고를 낸 사람은 돈도 권력도 있는 자라서 감옥에 넣어 봤자 풀려날 것이 분명하다. 차라리 합의금이라도 받는 것이 죽은 아이들도 바라는 일이라는 논리다. 저자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 “이유 중의 하나는 동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음속 속셈이었다.”라고 기술한다. “만일 보상이 많으면 혹시나 돈을 좀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보상을 받자, 마을 사람들은 가족들을 찾아가 돈을 빌렸다.
하지만 그 후 아버지는 안정된 생활 속에 유복하게 살아간 것이 아니라 “마치 무혈의 무서운 귀신”처럼 몸과 마음이 황폐화되어 일찍 노인이 되고 만다. 누구보다 죽음 가까이 간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오전에 글을 쓰러 나갔다가 돌아와 그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의 강 저 깊은 곳까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결핍, 슬픔, 상실, 무기력 속에 던져진 듯했고 유년의 기억을 들쑤셔놓았다.
아빠는 우리가 자랄 때 이런 불평을 하곤 했는데, 맞벌이를 위해 잠시 우리를 시골에 맡겨놓자고 해도 엄마가 반대했다는 얘기였다. 물론 아빠의 그 말에는 유난했던 엄마의 애정을 강조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나는 들을 때마다 불안과 반감을 느꼈다. 아마 엄마는 여러 이유에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골에서 자란 적 없는 아빠가 간과하고 있는 어떤 현실을 엄마는 느끼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시에서의 유년이 그보다 완전히 나았다고는 또 할 수 없었다. 무엇으로도 덮을 수 없는 ‘여린 상처들’이 있었으니까. 예를 들면 어느 날 짝이 머리에 상처를 입은 채로 학교에 왔고 그것이 걔 부모가 저지른 것임을 아는 일. 그 충격을 이해해 보고 싶었지만 누구에게도 상의할 수 없었던 일. 그렇듯 재처럼 흩어지는 마음들을 모으고 다 타버린 슬픔을 건너며 인간은 어른이 된다. 어떻게 보면 ‘사순 시기’는 그런 수난의 날들에 희미한 밑줄을 그어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악마와 동행하는 예수님의 동선이 없었다면
사순 첫 주의 복음은 《루카 복음서》의 한 구절이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보낸 40일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간 한 번도 떠올려 보지 않았던 의문이 들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악마를 예수님께서 아주 선선히 따라가시네, 하는 생각이었다.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볼 수 있는 높은 곳으로 안내해도 따라가시고 예루살렘도 가시고 성전 꼭대기에 서라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올라가셨다. 악마를 모른 체하거나 피하거나 침묵하지 않았다. 왜 그러셨을까, 하고 묻는 순간 다시 반문이 일어났는데,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무엇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악마와 동행하는 예수님의 동선이 없었다면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는 진리가,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는 당부가,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라는 충고가 우리에게 전해졌을까. 악이 발생했고 시험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겪는 시간’이 흐른 뒤 말씀이 남았다.
미사 시작 전에 참석자들은 성가대원 한 사람과 함께 그날의 입당 성가와 화답송을 미리 연습한다. 그분이 선창하면 우리가 따라 하는 방식인데, 지난주에는 “신부님이 사순도 기쁘게 노래하자고 하셨는데, 이 가사를 어떻게 기쁘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고 난감해하셨다. 성가에는 예수님의 수난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었다. 조롱과 발길질, 채찍, 가시관과 죽음. 하지만 다행히 그 끝은 “보속과 사랑”에 대한 환기였다.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이 다른 사람에게 가닿아야 하는 이유는 양가적이다. 거기에는 모든 인간이 그것을 겪으리라는 엄정한 현실과 하지만 각자 ‘지혜롭게’ 빠져나가기를 바라는 희망이 동시에 담겨 있다. 그래서 사순 기간에 내가 이 책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려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사순 시기에 저마다 ‘작은 희생’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는데, 그렇게 보면 유독 느리게 온 이 봄을 견딘 것도 그 일환이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예보 상으로는 오늘부터 기온이 겅중겅중 오르고 있다. 이 글을 마치고 나면 나는 발코니를 한 번 쓸고, 깨진 화분에서 겨울을 용케 버텨 낸 칼랑코에를 새 흙과 새 화분으로 옮겨줄 생각이다. 그리고 나서는 호수를 틀어 물을 듬뿍 주어야지. 겉흙이 부드럽게 부풀고 칼랑코에의 흙 속 잔뿌리들과 맨 아래 깔려 있는 모래흙까지 통과한 물이 화분 밖으로 넘치도록. 사순은 그렇게 실천된다. 가장 봄다운 봄으로, 부활을 기다리는 가지런한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