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를 위해 마리아가

영성과 신심

마리아를 위해 마리아가

나는 미사포를 벗고 씩씩하게 걸어야 하는 순간을 대모님에게서 배웠다.

2025. 03.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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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으려면 대모님, 대부님이 필요하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견진성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대모, 대부가 될 수 있다. 종교적 부모 역할을 하는 이 관계는 새 신자가 성당에 적응하고 종교를 통해 새로운 가족을 만났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실감, 대모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정확히 그랬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가톨릭에 아무 연고가 없어서 대모님을 스스로 구할 수가 없었다. 집안이 천주교인 사람들은 친척들이, 때론 직장 동료나 친구가 대모님을 맡지만 불가능했다. 만약 그러면 성당에서 소개해 주니 세례받는 데 그 점이 큰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나의 성격이었다.

사회적 페르소나를 적절히 갖춰 쓰는 덕분에 꽤 사교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평가받지만 나는 무척 내향적인 사람이다. 강연에서는 떨지 않을 수 있어도 사적으로 누군가를 만나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수가 줄거나 불필요하게 늘며 가슴이 쿵쾅댄다. 그리고 그런 자리를 다녀온 다음에는 열흘 정도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서 재충전을 해야 다시 세상으로 나갈 에너지를 얻는다.

 

 

우리 셋 다 마리아네요.” 

예비 신자 시절, 어느 날 미사를 마치고 나오니 마리아 수녀님이 나를 부르며 대모님이셔요.” 하고 소개해 주셨다. 대모님 세례명도 마리아였고 수녀님은 우리 둘과 어깨동무하며 우리 셋 다 마리아네요.” 하며 환하게 웃었다. 대모님께는 이미 루치아라는 대녀가 있었고 내가 두 번째였다. 대모, 대녀의 관계가 형식적으로 되어 가는 것 같아 언젠가부터는 대모를 잘 맡지 않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세례식 때 잠깐 보고 다시 이어 나가지 않을 사이를 만들고 싶지 않으셨다고. 바로 그 순간 나의 고질병이 되살아나 나는 일종의 공포에 휩싸였다.

하느님.” 그날 밤 나는 기도했다.

저 이제 어떡하죠?”

내 얘기를 들은 베프 J는 깔깔깔깔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지만, “어른과 친해지는 것 어렵지 않아?” 하고 항변했다.

물론 어렵지.” 어려서부터 나를 봐온 터라 척 보면 어떤 상태인지를 다 아는 친구는 말했다.

하지만 금희야, 하느님께 그런 기도를 할 정도는 아니야.”

그 밤 나는 대모님이 내게 비교적 적은 관심을 주시기를, 내 소심한 성격을 눈치채시고 내버려두시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깊은 사랑이 아니라 얕은 사랑을 향한 마리아의 기도를 듣고 하느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런데 내 걱정과 상관없이 대모님은 성당 내 중요한 직책을 맡고 계셔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성당에 신경 써야 할 사람이 나 말고도 말 그대로 산더미였다. 나와 마주치면 , 언제 연락 한번 해야 하는데.” 하며 황망해하시다가 연락할게.” 하며 미안해하셨다. 내가 우려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가족이 되어

세례식 직전이 되어서야 대모님과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받아들임 의식이 열린 것이었다. 눈을 가린 채 대모님 손에만 의지해 성당을 한 바퀴 돌아 성전으로 들어가는 이 의식은 이제 주님의 은총에 의지해 살겠다는 뜻이 들어 있다. 미사를 마치고 강당으로 가니 대모님이 김밥과 간식을 챙겨 옆에 앉으셨다. 그리고 내게 얼른 먹어 두라고 일렀다.

마리아, 성당에서는 있잖아. 먹을 수 있을 때 언제든 먹어야 해.”

먹을 수 있을 때 열심히먹는 것, 나는 그 말을 되새기며 우물우물 김밥을 먹었다. 대모님이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그 뒷말 또한 요즘 말로 쿨함그 자체였는데, “가톨릭은 있잖아. 분위기가 좀 바뀔 필요가 있어. 너무 어둡지 않니?” 하신 거였다. 나는 가톨릭 엄숙주의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신실하고도 카리스마있는 대모님께 빠져들어 가기 시작했다. 나는 멋진 여성에게 쉽게 반하는 편이니까. 그 뒤 대모님이 만들어 주신 성당 안의 내 자리는 너무 크거나 작지 않았고 지나치게 가깝거나 서운할 만큼 멀지도 않았다. 처음 함께 식사하던 날, 내게 마리아는 내성적인 성격이지?” 하고 슬쩍 확인하시고는 아주 적절히 날 받아들이셨다.

 

세례식 날, 나를 축하해 주러 온 가족은 집사람과 대모님 그리고 대모님의 또 다른 대녀 루치아 언니였다. 그렇게 가족이 되어 우리는 각자의 낯섦을 좁혀가며 세례식 후 점심까지 함께했다. 세례식과 관련한 기억이 많지만 요즘도 종종 떠올리는 장면은 이것이다. 대모님께 미사포를 선물받은 나는 세례식 날 처음으로 펼쳐 머리에 썼다. 무늬가 아름답고 얼굴을 잘 감쌀 수 있게 끝단에 작은 장식이 달린 정갈한 물건이었다. 세례식이 끝나고 신부님이 주보를 통해 본당 소식을 알릴 즈음,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정리를 하며 미사포를 벗었다. 그때 뒤에 앉아 계시던 대모님이 다가와 마리아, 미사포는 끝까지 쓰고 있어야 해.” 하고 속삭였다. 알고 보니 사제 강복 뒤 파견될 때까지 미사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영성체를 통해 얻은 힘으로 세상을 향해 나갈 정확한 타이밍, 마리아이자 김금희인 삶을 위해 미사포를 벗고 씩씩하게 걸어야 하는 순간을 대모님에게서 그날 배웠다.

 

지난겨울, 미사에 갔다가 대모님과 마주쳤는데 문득 마리아, 김장했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김치를 딱 한 번 만들어 봤다. 배추가 그렇게 힘이 센 채소라는 사실을 그날 알았다. 소금물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꼿꼿했고 고춧가루와 젓갈을 혼합한 양념을 자기만의 표면 장력으로 고스란히 밀어냈다. 대참사 이후 나는 김치는 사거나 얻어먹는 거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빠가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올해부터는 김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나는 전혀 아쉬움이 없었다. 일흔이 넘은 엄마가 김장이라는 힘든 노동을 스스로 포기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 저희는 김장 안 했어요.”

대모님이 갑자기 물으셨을 때만 해도 나는 으레 하는 근황 인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뒤 대모님이 김치를 경비실에 맡겨 놓고 가겠다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셨다. 무릎 치료를 받으러 근처 병원에 오셨다고. 놀랍고 반가워 아파트 앞으로 나갔더니 대모님은 내게 김치 한 통을 주시고 마침 들어온 신호등 신호가 끊기기 전에 얼른 횡단보도를 달려 되돌아가셨다.

대모님, 감사해요!”

횡단보도 이편에서 내가 외치자 마리아, 김치는 하루 뒀다 김치냉장고에 넣어!” 하는 명랑한 답이 맞은편에서 들려왔다. 그 밤 나는 또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는데, 당연히 그전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기도해 주는 이 없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지지난 주일은 이렇게 새 가족을 만나게 해 준 마리아 수녀님의 이임식이었다. 원래는 지인의 결혼식에 가야 했지만 고민 끝에 집사람만 보내고 미사에 참여했다. ‘축하하는 자리보다 이별하는 자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성당에서 처음 맞는 이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수녀님은 철원의 성당으로 가신다고 했다. 철원, 하자 추위 때문인지 남극에 다녀오는 동안 기도해 주셨던 수녀님이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생각은 그곳에서 아주 요긴하게 썼던 보온병으로 흘렀다. 미리 보온병을 주문했는데 받아보니 생각보다 너무 컸다. 마리아 수녀님의 여린 팔로는 들고 다니실 수 없을 것 같았다. 반품하고 다시 고른 보온병은 수녀님 손에 들려 성당 곳곳을 누비기에 맞춤했다. 나는 이 이별에 너무 마음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만큼 멀어지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니까.

 

이임식 날, 낯선 얼굴의 나이 지긋하신 신자분들이 눈에 띄었는데 알고 보니 수녀님이 수도자의 길을 걷는 동안 죽 지켜봐 온 지인분들이었다. 나는 그제야 수도자나 사제의 삶도 한 권의 책을 써 내려 가는 과정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행하며 읽어 내려가는 시선과 마음들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그의 삶은 개인을 넘어 모든 그리스도인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수녀님은 처음 우리 본당에서 수도자직을 시작한 뒤 40년 만에 돌아와 지냈다는 말로 이임사를 시작했다. 그때는 너무 어려 애기 수녀님이라 불렸다고. 수녀님이 돌아와 우리 본당을 다시 맡은 시기는, 불미스러운 일로 성당이 혼란을 겪고 있을 때였다. 성당에서도 당연히 사람 사이의 일이 다 일어난다. 여기는 낙원이나 유토피아가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사제가 미사에서 평화 예식을 행하며 이렇게 말할 때 나는 믿음을 통해 교회가 되는 그 순간의 집체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잠깐 동안 어쩌면 구원의 완성일지도 모를 충만함을 느낀다. 하지만 미사가 끝나고 미사포를 벗으면, 아니, 어쩌면 성당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라고 스스로의 불완전성에 대해 고백해야 하는 존재로 되돌아간다.

수녀님의 마지막 인사는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저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해 주는 이 없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였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해 그 말을 스마트폰으로 메모했다.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 다시 이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다.

 

이번 주 성당에는 당연히 마리아 수녀님이 안 계셨다. 빈자리를 마음으로 더듬으며 미사 시간을 보냈다. 성당을 나서다 루치아 언니네 식구들과 마주쳤고 어색하게 인사하다 나도 모르게 언니는 오늘 안 왔어요?” 하고 찾았다. 식구들이 성당 사무실에 갔다고 설명하는 사이 언니가 나타났고 나는 성큼 다가가 언니!” 하고 반갑게 불렀다. 기껏 불러놓고는 다시 우물쭈물하며 이제 따뜻해진대요.” 하는 날씨 얘기만 늘어놓았다. 언니는 금희 씨, 잘 지냈죠?” 하고 웃었다. 견진성사를 받을 때는 루치아 언니가 대모가 되어 주었다. 그전과 같은 두려움은 생기지 않았다.

마리아 수녀님이 개설한 부활 세례반 채팅방이 있다. 함께 세례받은 뒤 3년간 우리는 여기서 매일 《성경》을 읽어 왔다. 어제 나는 마리아 수녀님이 혹시 채팅방을 나가셨을까, 살펴보았다. 철원으로 떠나신 뒤 아무 말씀이 없으셨지만 아예 대화 목록에 없다면 마음이 쿵 내려앉을 것 같았다. 다행히 수녀님은 그대로 계셨고 그것만으로도 다시 마음이 안온해지는 기분이었다. 수녀님이 없는 미사 시간에도 당연히 수녀님을 위해 기도했다. 깍지를 낀 두 손을 꼭 쥐고 바쁘게 새 교회를 누비고 있을 마리아를 위해, 마리아는 기도했고 앞으로도 기도할 것이다.

 
Profile
2009년 <한국일보>로 등단해 《너무 한낮의 연애》(2016), 《경애의 마음》(2018), 《대온실 수리 보고서》(2024) 등의 소설과 《식물적 낙관》 등의 산문집을 냈습니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분투 중이며, 밤마다 가톨릭 책을 읽다가 잠에 들어 가족들에게 ‘재야 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60여 종의 식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식집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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