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딱딱한 돌이 된 채 며칠을 보냈다. ‘돌’이 되는 건 이렇게 진행된다. 일단 몸이 아프다, 마음이 옹졸해진다, 몇몇 이들의 형태가 참을 수 없어진다, 냉소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뭔가를 하자는 요청에 화가 난다, 몸이 더 아프다. 처음에는 냉방병으로 시작됐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이 찢어질 듯 아픈 밤을 보내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목이 부었다며 의사는 약을 처방해 주었고 나는 거기에 더해 면역 주사까지 맞겠다고 했다.
“오늘 행사가 있거든요. 피곤하면 안 돼서.”
의사는 목 염증이 컨디션이 안 좋은 탓일 수도 있다며 적당한 주사 처방을 내려 주었다. 그날 저녁 행사는 걱정과 달리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기침이 나거나 목소리가 안 나오면 어쩌지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는 초기에 얼른 병원에 간 나를 칭찬했다. 플라시보 효과에 그치고 말지라도 면역 주사를 돈 들여 맞은 것도.
하지만 그다음 날부터 컨디션은 더 안 좋아졌다. 체기가 생겨나서 거의 밥을 못 먹더니 한동안은 나타나지 않던, 몸과 마음이 커다란 돌멩이가 되어 버린 듯 완고하고 딱딱한, 쪼그리고 앉아 언제든 누군가를 할퀴고 말 것 같은 긴장을 껴안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집에 있는 몇몇 약들, 항불안제, 위 보호제 등을 털어 넣었고 한나절 넘게 굶으면서 몸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와중에도 보내야 할 원고가 있어서 글을 쓰고 나니 신경은 더 곤두섰고 나는 일과 관련된 것 중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나 확인해 보았다. 오랜 경험으로 볼 때 위통은 스트레스와 연관 있었으니까. 문제가 되는 음식을 먹은 적도 없고 많이 먹으려야 많이 먹을 위도 가지지 못한 터라 언제나 원인은 정신이었다. 위는 제2의 뇌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래저래 노력해도 명확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고 나는 혼자 덩그러니 놓인 돌덩이처럼 집 안에 앉아 사흘을 외출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으니 그런 삶이야말로 내게 어울리는 자리 같았다. 곁에 아무도 없이 몇 권의 책만 간신히 나를 지탱하는 일상. 아주 친숙한 고립감이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위는 아팠고 하는 수 없이 진정제로 쓰는 비상약을 먹고,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그리고 주일이 되었다.
숨어서 누구 눈에도 들고 싶지 않은 마음
요 며칠 청년부 미사를 갔는데 오늘은 교중 미사를 가고 싶어졌다. 이미 열한 시가 넘었을 줄 알았는데 아침을 먹고 나니 열 시 정도가 되어 있었다.
“성당 다녀와야겠다.”
“왜? 요즘에 오후에 갔잖아.”
왜인지는 말할 수가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까. 아침에 눈 뜨자마자 제대로 된 공감을 하지 않는다며 이미 내게 한마디 들은 집사람은 날이 더우니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며칠 동안 ‘모든 것이 허무도다!’ 하며 투덜댔던 터라 나는 되도록 얌전히 미사를 가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사 가방이 없었다. 미사포, 이름표, 늘 가지고 다니는 티슈, 거울 하나가 들어 있는 그 간소한 가방이. 이런저런 짐들을 헤집으며 집사람과 함께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 가방이 없으면 생기는 불편은 영성체를 할 때 내 이름을 신부님이나 수녀님, 혹은 성체 분배자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는 점뿐이었다. 우리 성당에서는 그렇게 이름을 부르며 영성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마리아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숨고 숨고 숨어서 누구 눈에도 들고 싶지 않은 마음, 길가의 무수한 돌멩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은 마음.
“성당 확 그만둘까. 성당 가방도 없는데.”
지난주 다녀오고 아직 풀지도 못한 캐리어를 보다가 불쑥 내뱉었다. 말해 놓고 나 자신도 약간 놀랐다.
“그래, 그만둬.”
내 밑도 끝도 없는 짜증에 지쳤는지 집사람도 그렇게 나왔다.
“뭐? 이제 보니 데블(devil)이 우리 집에 있었네.”
나는 농담으로 넘겼고 가방을 그만 찾겠다고 멈췄다. 그냥 가겠다고. 하지만 집사람은 계속 집 안을 살펴보면서 “가방 찾아야지! 성당 그만두면 어떡해!” 하고 날 슥 달랬다. 그렇게 한고비 넘기자 현관에서는 또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하느님은 날 사랑하지 않으셔!”
평소에는 늘 반대로 얘기했던 터라 나는 내가 어떤 마음을 덮기 위해 자꾸 억지를 쓸까 싶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가, 뭐가 스트레스라서 몸까지 아픈가. 그런데 그게 하느님 탓인가? 성당 가방 탓인가?
그 가늠할 수 없는 사랑
교중 미사는 오랜만이었다. 우선 마당으로 가서 신부님 앵무새 ‘어이’와 인사했다. 황금관앵무인 어이는 감정 표현이 풍부하고 호오가 분명한 앵무새다. 다행히 내 손길을 좋아해서 철장 가까이 가서 “어이” 하고 부르면 횃대를 타고 옆으로 걸어와 곧장 꼬리를 들고 날갯죽지를 편다. 긁어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손가락으로 긁어주면 혓바닥으로 딱딱딱 소리를 내며 기분 좋아하고 머리를 양순하게 내린다. 어이의 날갯죽지에는 털이 듬성듬성 빠져 있어서 나이를 가늠할 수 있고 나는 그렇게 드러난 맨몸 주변을 더 가만가만 쓸어 준다.
일주일에 한 번 보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는지도 신기하고 내 손길을 가만히 받아주는 무던함도 고맙다. 마음은 조금 풀어졌지만 나는 평소와 달리 성당 끝자리에 앉았고 멀리 반가운 루치아 언니를 보면서도 가서 인사할 힘을 못 냈다. 그런 스스로가 한심해서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미사가 시작되고 오늘의 복음을 신부님과 합송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앞자리에 하필이면 미사 중간중간 딴짓을 하는 신자 둘이 앉아 있어서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죄를 고백하고 나서 미사 중간에 이웃에 대한 미움을 갖다니, 나는 차라리 눈을 감고 강론을 들었다. 오늘은 본당 신부님이 아니라 신부님의 친구 신부님이 집전하셨는데 이야기의 마지막쯤 이런 말씀을 하셨다.
“기도를 하더라도 다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 어느 것은 들으시고 어느 것은 듣지 않으시는지 사제인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미워하고 싶으면 미워하십시오. 욕하고 싶으면 욕하십시오. 다만 하느님을 저버리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눈물이 스며 나오는 것을 느꼈다. 최근 2년 동안 나는 절대 울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위기를 넘겼기 때문에 이번에도 참았다. 울지 않는 건 마음이 굳세고 싶다거나 이제 나이가 들어 여유로워졌다거나 하는 차원의 의지가 아니었다. 많은 일이 일어났고 상처받고 힘이 들었기에 우는 것으로 그 고통을 휘발시키고 싶지 않다는 오기였다. 눈물보다 더한 것으로 돌려받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사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성당 분이 수박 먹고 가라고, 바쁘면 집어라도 가라고 붙드셨다. 나는 연신 사과하며 도망치듯 성당을 빠져나왔다. 다시 집사람을 만나 집으로 가는데 집사람이 “근데 너 얼굴이 왜 이렇게 조그매졌어?” 하고 물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성당에서 좀 울었어.” 하는 말을 시작으로 나는 진짜 울기 시작했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있는 힘껏 무언가를 벗어 내듯이 훌쩍거렸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잔뜩 돌멩이처럼 굳어 버린 건 어느 집에나 늘 있을 법한 문제, 원가정의 불화 때문이었다. 되짚어보니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날부터 위통은 시작되었고 내가 돌멩이처럼 작고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무리 내가 뭔가를 이루고 만들어 가고 있어도 단번에 그 의지를 꺾어 버리는 원가정이라는 저 무서운 세계를. 그렇게 꽝 닫힌 내 몸과 마음을 연 것이 “하느님을 미워하고 욕하십시오.”라는 말이었다는 진실을. 불행히도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 내 편이 되어 주리라는 신뢰를 주는 가족 구성원들과 성장하지는 못했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 보면 나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불안과 함께 지독한 무기력이 찾아든다.
그런데 그러지 말고 당신을 욕하라는, 미워하라는, 얼마든지 괜찮다는 말이 눈감은 내 귀에 들려온 것이었다. 인간이 제게 준 상처를 왜 당신이 받으려고 하세요? 하고 항변하면서도 나는 울고 말았다. 그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을 오늘에서야 믿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