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예식이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 126,5)
이 시편 말씀대로 우리는 눈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를 치렀고, 환호하며 레오 14세 교황의 선출을 맞이했습니다. 전임 교황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었으니, 새 교황은 그 자리에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요한 12,24 참조).
전례는 한 교황이 선종하여 묻힌 뒤에 다음 교황이 직무를 시작하는 모든 과정을 함께합니다. 교황이 사망하면 추기경들은 <교황 장례 예식(Ordo Exsequiarum Romani Pontificis)>의 규범에 따라 그 영혼을 위하여 9일 동안 계속되는 장례를 거행합니다.
장례를 마치면 교황 선거 과정이 시작되고 선거인 추기경들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모여 교황 선출 기원 미사(Missa votiva pro Eligendo Papa)를 장엄하게 거행합니다. 교황 선거 봉쇄 회합, 일명 콘클라베(Conclave)가 열리는 날, 선거인 추기경들은 적절한 오후 시간에 예복을 입고 교황궁의 바오로 경당에 모여, 성령의 도움을 청하는 노래 ‘오소서, 성령님(Veni Creator)’을 부르며 장엄한 행렬로 교황궁의 시스티나 경당으로 갑니다. 이때부터 <교황 선거 봉쇄 회합 예식(Ordo rituum Conclavis)>에 따라 매일 오전과 오후에 투표 예식이 진행됩니다.
마침내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 선언으로 새 교황의 탄생을 알리면, 새 교황은 <로마 주교의 베드로 직무 시작 예식(Ordo rituum pro ministerii Petrini initio Romae episcopi)>에 따라 교황 즉위 또는 취임 예식을 거행합니다. 실로 모든 것이 예식이라고, 예식으로 시작하여 예식으로 끝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교황 직무의 시작을 알리는 미사
새 교황은 즉위 미사로 직무 시작을 알립니다. 사실 교황 직무는 교황 선거 직후, 새 교황이 직무를 수락하는 즉시 시작됩니다. 새 교황은 이미 여러 기회에 연설하고 여러 곳을 찾고 여러 인물을 만나고 여러 단체와 회동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과 별개로 하느님과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베드로의 직무를 받는 미사를 거행하여, 교황 직무가 영적인 권위의 행사이자 그리스도의 양들을 돌보는 임무(요한 21,15-17 참조)라는 점을 확인하고, 직무 수행에 꼭 필요한 성령의 힘을 받습니다. 교황 즉위 미사에는 이러한 특성을 알려 주는 몇 가지 전례 상징이 있습니다.
1. 성 베드로의 무덤 예방
광장에서 열리는 미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제의를 갖춰 입은 새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 제대 밑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무덤을 찾아 그 앞에서 기도하고 분향으로 예를 표합니다. 무덤 바로 앞에는 새 교황의 어깨에 얹을 팔리움(Pallium)과 그 손가락에 끼워 줄 어부의 반지(Anulum Piscatoris)를 놓아, 베드로 직무와 교회 전통의 연속성을 일깨웁니다. 교황을 돕는 부제 두 사람이 베드로 직무를 나타내는 이 두 가지 물건을 꺼내 들고 제자리에 서면, 광장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입당 행렬이 시작됩니다.
2. 노래 ‘임금이신 그리스도(Laudes Regiae)’
입당 행렬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노래합니다. 일종의 성인 호칭 기도인 이 노래는 예부터 교황 즉위, 황제 대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혈 대축일 같은 아주 성대한 전례 거행에서 불렀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즉위 미사 강론에서,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 그를 보살펴 주옵소서(Tu illum adiuva)”, 즉, “베드로 사도의 새 후계자를 보살펴 주옵소서.” 하고 여러 번 도돌이표처럼 기도하는 이 노래에서 커다란 위로와 살아 있는 교회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특히 이 후렴을 들으면서 커다란 위안을 받았습니다. …… 이제 이 순간 하느님의 미약한 종인 저는 참으로 모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이 엄청난 과업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 일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이 일을 해내야 하겠습니까? 저의 친애하는 동료 여러분께서 조금 전 인간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역사 안에서 위대한 이름을 떨치신 수많은 성인께 기원을 드렸습니다. 이처럼 저 역시 새로운 확신을 가지고 제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서 결코 짊어질 수 없는 것은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됩니다. 하느님의 모든 성인이 저를 보호하고 돌보시고 저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당신과 같게 만드신 그 선물에서 생명을 받은 우리 모두가 성인들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놀라운 경험입니다.
3. 팔리움
행렬이 광장의 제대에 도착하고 노래가 끝나면, 새 교황의 어깨에 어린양의 양털로 만든 팔리움을 얹어 줍니다. 이 전례 복장을 통하여, 교황은 잃은 양을 되찾아 어깨에 메고 오시는 착한 목자를 입는 것입니다(루카 15,4-6 참조). 교황의 어깨에 팔리움을 얹어 주는 추기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양들의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무덤에서 가져온 이 팔리움을 그대 위에 얹어 주시기를 빕니다. 착한 목자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 어린양들과 양들을 돌보라고 명하셨습니다. 오늘 그대는 베드로의 뒤를 이어,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신앙의 선조로 모신 이 교회의 주교직을 물려받습니다. 성부에게서 발하시는 진리의 성령께서 형제들을 신앙의 일치 안에서 굳세게 하는 직무 수행에 필요한 지혜와 말씀의 은사를 풍성히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새 교황이 팔리움을 입으면 또 다른 추기경은 다음과 같은 말로 기도합니다.
하느님, 바르고 경건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시니,
교회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어
당신 종 저희 교황 ( )에게 강복하소서.
하느님께서는 저희의 겸손한 봉사를 통하여
교황에게 최고 권위를 지닌 사도 직무를 허락하셨나이다.
비오니, 이 교황이 성령의 은총으로 힘을 얻고,
자신이 받은 탁월한 은사에 따라 드높은 직무를 합당히 수행하게 하소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즉위 미사 강론에서 팔리움에 담긴 전례 상징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습니다.
로마의 주교들이 4세기 때부터 착용한 이 오래된 상징은 그리스도의 멍에의 상징으로 여길 수 있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인 로마의 주교가 어깨에 두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멍에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 양모는 목자가 어깨 위에 들쳐 메고 생명의 물가로 인도하는 길 잃고 병들고 약한 양을 상징합니다. …… 인류는 ─ 우리 모두는 ─ 광야에서 헤매는 길 잃은 양입니다. …… 양의 상징은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의 근동에서는 왕들이 자신을 백성의 목자로 여기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권력의 상징이었으며, 일종의 냉소적인 상징이었습니다. 왕에게 신하들은 목자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양과 같았습니다. 모든 인류의 목자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양이 되셨을 때 그분께서는 짓밟히고 죽임을 당하는 양들 곁에 계셨습니다. 이리하여 당신 자신께서 참된 목자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4-15)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 양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통해 세상이 구원되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인내를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조급함 때문에 파괴되었습니다.
4. 어부의 반지
베드로 직무는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일이면서 동시에 “사람 낚는 어부”(마태 4,19)의 일입니다. 이 임무에는 하늘 나라의 열쇠와 묶고 푸는 권한(마태 16,19)까지 들어 있습니다. 교황에게 어부의 반지를 전달하는 추기경은 교황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황 성하,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영혼의 목자요 보호자, 반석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께서 어부 베드로의 인장이 담긴 이 반지를 그대에게 주시기를 빕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당신께 희망을 두었던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오늘 그대는 사도 베드로의 뒤를 이어, 바오로 사도께서 가르치셨듯이 사랑으로 다스리는 이 교회의 주교직을 물려받습니다.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의 성령께서 그대에게 온유와 힘을 주시어, 그대의 직무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을 일치와 친교 안에서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즉위 미사 강론에서 어부의 반지에 담긴 전례 상징에 대해서도 묵상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들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곧 하느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참된 생명으로 이끌도록 역사의 깊은 바다에 나가 그물을 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교부들은 이 독특한 임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매우 중요한 말을 하였습니다. 물에서 살도록 창조된 물고기들이 인간의 양식으로 쓰이고자 자신의 생명의 요소인 바다에서 건져 올려지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낚는 어부의 임무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빛도 없는 어둠의 바다에서, 고통과 죽음의 소금물 안에서 소외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그물이 우리를 죽음의 물에서 건져 내어 하느님의 빛의 광채, 참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진실입니다.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될 사명을 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온갖 형태의 소외로 절은 바닷물에서 인간들을 건져 올려 생명의 땅으로, 하느님의 빛으로 인도하여야 합니다. …… 목자의 사명,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은 때로는 피곤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답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진정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려는 하느님의 기쁨에 봉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5. 순명 서약
교황의 직무를 나타내는 팔리움과 어부의 반지를 착용하고 자리에 앉은 교황에게 추기경 대표 몇 사람이 나아가 순명을 서약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즉위 미사에서는 김수환 추기경도 순명 서약에 참여한 열두 추기경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순명 서약이 끝나면 보통 하던 대로 미사가 이어집니다.
간소해진 교황 즉위 예식
이것이 오늘날 일반적인 교황 즉위 예식입니다. 로마 주교의 베드로 직무 시작을 위한 과거의 특별하고 화려했던 예식 전통은 최근의 교황 전례 거행에서 점차 힘을 잃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시작된 교황 전례 간소화 과정에서 옛 교황 궁정에 관련된 예식과 새로워진 전례 감각에 부합하지 않는 예식 요소들이 사라졌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교황 대관 예식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즉위 미사 강론에서 더 이상 교황 대관 예식을 하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예전에는 베드로의 후계자가 교황직에 오를 때, 삼층관(triregnum) 또는 삼중관(tiara)을 받아 썼습니다. 마지막으로 삼중관을 쓴 교황은 1963년 바오로 6세였는데, 그분조차 장엄 대관 예식 이후 다시는 삼중관을 쓰지 않으셨고, 후임자들이 이 문제를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맡기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요한 바오로 1세 교황도 삼중관을 바라지 않으셨고, 그 후임자인 저 또한 오늘 삼중관을 쓰지 않습니다. 지금은 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잘못 여겨지는 예식이나 물건으로 돌아갈 때가 아닙니다. …… 과거에 교황이 머리에 쓴 삼중관은 사실 주님께서 당신 교회에 대해 품으신 계획을 표현하는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교계 질서, 교회 안에서 행사되는 모든 ‘거룩한 힘’은 다름 아닌 봉사,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진 봉사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바로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이라는) 이 삼중 사명에 참여하여 항상 주님의 권능 아래 머물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힘은 이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미사에서 주교 시절부터 사용해 온 소박한 주교관과 장식 없는 단순 제의를 입었습니다. 베네딕토 16세가 쓰던 목자 지팡이를 물려받아 사용했고, 노래와 전례 행위를 간소하게 하도록 당부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순금으로 제작해 온 어부의 반지마저 은반지를 도금하여 만들게 했습니다. 이런 태도들 또한 기본적인 전례 상징들과 더불어 교황 직무의 본질을 일깨워 주는 또 다른 실제 상징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