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이어, “레오”라는 교황명을 가진 교황들의 역사를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다.
“레오”라는 이름을 가진 교황들의 역사
성 레오 3세(795~816년)의 재위 기간은 프랑크족 카알 대제(샤를마뉴)의 전성기와 정확히 맞물려 있다. 레오 3세는 반역자들의 모함으로 고발되어 교황직에서 축출될 위기에 처했으나, 자신의 무죄를 옹호하고 교황직을 회복시켜 준 프랑크 왕 카알 대제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며, 800년 성탄 대축일 미사 중에 직접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당시 그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했는데, 이는 교황이 서방의 황제에게 공개적으로 경의를 표한 최초이자 마지막 사례로 기록된다.
이 대관식을 통해, 476년에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 서로마 제국의 황제권이 약 3세기 만에 부활하였으며, 그 주인공은 라틴계가 아닌 게르만족 출신의 왕이었다. 카알 대제는 이로써 비잔틴 제국 황제와 대등한 권위를 갖게 되었고, 교황에게 관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제국 권위에 신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동시에 교황의 권위 또한 강화되었고,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 사이의 정치적・종교적 제휴는 긴밀히 결속되었다. 이로써 교황청은 비잔틴 제국에 대한 의존을 탈피하고, 서유럽에서 자율적인 권위의 중심 기관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알 대제는 스스로를 “왕이며 사제(rex et sacerdos)”라 부르게 할 정도로 교회에 대한 주도권과 보호권을 자임하였으며, 그 결과 교회는 점차 제국 권력에 예속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곧 교황의 영적 권위와 황제의 세속 권위가 경계 없이 얽히는 중세 교회-국가 관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시작점이 되었으며, 이후 수 세기 동안 이어질 교황과 황제 사이의 긴장과 갈등의 서막을 여는 장면이기도 하였다.
성 레오 4세(재위 847~855년)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846년 사라센족의 침입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로마를 외세의 위협에서 지키는 일이었다. 그는 도시 성벽을 보수하고, 티베르강둑을 따라 새로운 방어 성벽을 축조함으로써, 그동안 외부 공격에 노출되어 있던 성 베드로 대성전 일대를 방어 체계 안에 포함했다. 이로써 후대에 ‘레오의 도시’(Civitas Leonina)라 불릴 성좌 관할의 새로운 요새 도시 구역이 형성되었다. 또한 레오 4세는 프랑크 황제와의 관계 속에서 교황권을 적극적으로 수호하였으며, 교회의 규율을 복원하고 개혁을 단행한 의지적인 교황으로도 기억된다.
레오 5세(903~904년)는 로마 남쪽 약 37킬로미터 떨어진 아르데아(Ardea)의 본당 신부였으며, 로마 성직자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감을 샀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반란이 일어나 강제로 퇴위당하고 투옥되었으며, 이후에는 자신을 대립교황으로 자처한 크리스토포루스와 함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결국 둘 다 정치적 암투 속에서 처형당한 불운한 교황으로 기록된다.
추기경이자 교회사학자인 체사르 바로니우스(Cesare Baronio, 1538~1607년)은 880년부터 1046년까지의 시기를 ‘암흑의 세기(Saeculum obscurum)’라고 특징지었다. 이 시기의 교황권은 보편적인 황제권의 지지를 상실한 채, 타락한 로마 귀족 계급의 당파적 이해관계에 휘말리며 보편 교회의 상징으로서의 의의를 잃고, 결국 로마 귀족 가문의 권력 투쟁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 로마에서는 투스쿨룸파가 그들의 우두머리 테오필락투스(Theophylactus)의 주도 아래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의 아내 테오도라와 두 딸인 마로치아(Marozia)와 소 테오도라는 수십 년에 걸쳐 교황좌와 로마 정국을 실질적으로 좌우하였다. 이 시기의 교황들은 임명되고, 파면되며, 추방되고, 투옥되거나 살해되는 일이 반복되었고, 그들의 권위는 로마 귀족의 흥정 대상이자 정략적 도구에 불과하였다.
레오 6세(928년 5월~12월) 역시 마로치아의 뜻에 따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마로치아의 아들 요한(훗날 요한 11세)이 교황직에 오를 준비가 될 때까지의 임시방편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마로치아의 미움을 사게 되어, 재위 불과 6개월 반 만에 투옥되었고, 끝내 살해당했다.
요한 11세의 후임자인 레오 7세(936~939년) 또한, 932년부터 954년까지 로마를 실질적으로 지배한 알베리코 2세(Alberic II)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로마 태생의 수도자 출신이었던 그는 주로 교회 업무에 전념하는 역할로 제한되었으나, 알베리코 2세의 전적인 후원 아래 클뤼니 수도원 개혁 운동과 로마 및 인근 지역의 수도원 쇄신을 적극 지지하고 장려한 교황으로 기억된다.
레오 8세(963~965년)는 신성 로마 제국 오토 1세 황제가 알베리코 2세의 서자인 요한 12세를 폐위한 뒤 그의 지시에 따라 교황직에 임명되었다. 요한 12세는 재위 말기, 오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잔틴 제국과 연계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정치적 반전은 결국 그의 폐위로 이어졌다.
레오 8세는 당시 라테란 궁정의 고위 공무원이자 교회 문서 보관 책임자로 평신도였는데, 교회법에 위배되게도 하루 만에 모든 성품을 받고 라테란 대성당에서 교황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폐위되었던 요한 12세가 반란을 일으켜 복위되면서, 레오 8세는 교황직에서 쫓겨나고 파문당했다. 이후 요한 12세가 급사하자, 로마인들은 황제의 교황 임명권 행사에 대한 반발로, 오토 황제의 의사를 무시한 채 베네딕토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교황좌에 앉혔다. 이에 오토 1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입하여 베네딕토 5세를 폐위시키고 레오 8세를 다시 복위시킴으로써, 황제권이 단순한 외교적 후견을 넘어, 교황 선출과 승인 과정에도 직접적인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명백히 드러냈다.
성 레오 9세(1049~1054년)는 알자스의 에게스하임(Eguisheim) 출신으로,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지명된 세 번째 독일인 교황이었다. 툴(Toul)의 주교였던 그는 로마 성직자단과 백성이 자신을 교황으로 받아들일 경우에만 이를 수락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주교직을 유지하다가, 1049년 순례자 복장으로 로마에 입성하였고, 로마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레오 9세는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부정(不貞)을 강력히 비난하며, 유능한 인재들을 고문단에 기용하고 교황청의 행정과 도덕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남부 이탈리아를 약탈하던 노르만족에게서 교황령과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였다가, 전투에서 패해 9개월간 노르만족의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포로 신분으로 동방 교회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며, 1054년 훔베르투스(Humbertus) 추기경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양측 대표의 무지와 무책임, 상호 이해 부족으로 인해 이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고, 동방과 서방 교회의 공식적인 분열이 시작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레오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심신이 쇠약한 상태로 로마로 돌아왔고, 한 달 뒤, 마지막 기도를 모국어인 독일어로 바친 후 선종하였다.
성 레오 9세에 이어 거의 500년이 지난 뒤, “레오”라는 교황명을 다시 택한 인물은 레오 10세(재위 1513~1521년)이다. 그는 그 유명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둘째 아들로, 장남은 가문을 잇고 차남은 성직자가 되는 당시 관습에 따라 일찍이 교회에 봉헌되었다. 르네상스 교황으로서 레오 10세는 교활한 정치가이자 노골적인 족벌주의자였으며, 그의 주요 관심사는 외세로부터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자유를 지키고, 동시에 가문의 영향력을 피렌체 바깥까지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향락적이고 낭비벽이 심한 성향을 지녔으며, 그 사치에 더해 전쟁과 십자군,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전 재건축이라는 막대한 재정 부담을 감당해야 했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그는 성직 매매에 손을 대었고, 율리오 2세에 의해 처음 공인된 대사(大赦)를 갱신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 기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특히 막데부르크와 마인츠 대교구를 겸하던 알브레히트 추기경과 거래를 통해 성직을 매매하고, 이를 통해 독일 전역에 대사 선포를 추진하였다. 이 대사 선포는 결국 아우구스티노회 수사 신부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게 만든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곧이어 종교 개혁이라는 유럽 역사상 가장 격렬한 신앙의 분열과 제도 개혁의 물결을 촉발했다. 그 결과, 북유럽은 급속히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교황청은 정치적 신뢰를 잃은 채 막대한 채무와 도덕적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레오”라는 교황명을 택한 인물은 메디치 가문 출신의 레오 11세(1605년 4월 1일~27일)이다. 그는 필립보 네리 성인에게 깊은 영향을 받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피스토이아 주교와 피렌체 대주교를 지냈다. 신심이 깊고 개혁 의지가 강했던 그는, 성 마르코 성당의 도미니코회 수사들과 깊은 친분을 맺었고, 자신의 교구에서 트렌토 공의회의 개혁 조치를 적극적으로 실행하였다. 또한 로마 내 성당 복원에 아낌없이 투자하였으며, 교황청 안팎에서 메디치 가문의 권위와 존재감을 상징적으로 복원하려는 의도로, 로마의 피나치오 언덕에 위치한 메디치 가문 저택(Villa Medici)을 고가에 구입하기도 하였다.
클레멘스 8세 교황 치하에서는 프랑스 특사로 임명되어, 교황이 앙리 4세의 파문을 철회하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프랑스 측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클레멘스 8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자기 삼촌의 이름을 따라 ‘레오’라는 교황명을 택하였다. 그러나 선출 당시 이미 고령이었고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기에 재위 27일 만에 선종하였고, 그로 인해 역사상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을 지닌 교황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거의 220년이 지난 후, “레오”라는 교황명을 택한 인물은 레오 12세(1823~1829년)이다. 스폴레토 출신으로 로마에서 유학한 그는, 루체른과 쾰른 주재 교황 대사, 레겐스부르크 의회 사절, 파리 교황 대사 등을 거쳐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 세니갈리아 주교, 로마 총대리, 교황청 성성의 장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비오 7세의 후임자로 선출되어 교황직에 올랐다. 레오 12세는 확고한 보수주의자로서 종교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무관심주의와 관용주의, 프리메이슨 등을 단죄하고, 금서 목록과 검사성성을 강화하였다. 또한 예수회에 호의적인 조치를 발표했으며, 교회법정 제도를 19세기 이전의 방식으로 복원하였다. 그는 1825년을 성년(聖年)으로 선포하였으나, 이탈리아 밖에서 로마를 찾은 순례자는 매우 적었다. 소박하고 경건하며 도덕적이었지만 지도력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급속히 변화하는 근대 세계에 대한 이해와 적응력 역시 결여되어 있었다. 사망 이후, 당대 로마 시민 사이에서도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했던 교황으로 기억되었다.
그리고 같은 세기에 레오 13세(1878~1903년)가 교황직을 맡았다. 1878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교황이 흰색 교황복으로 갈아입는 곳인 ‘눈물의 방’(Stanza delle Lacrime)에서 “나는 교황직을 수행하기엔 너무 늙었다.”며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67세였던 그는 예상을 뒤엎고 93세까지 장수하며 26년간 교황직을 수행하였다. 로마 출신으로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수학한 뒤, 벨기에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되었고, 그 과정에서 쾰른, 런던, 파리를 방문하며 산업화되고 의회가 활동하는 현대 유럽의 정치・사회 현실을 처음 접하였다. 그 후에는 페루자 주교와 교황청 궁무처 처장을 거쳐, 비오 9세의 선종 후 세 번째 투표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레오 13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전통 교의의 관점에서 교회가 현대 사회와 대화를 시도하도록 이끈 것이다. 그가 1879년에 반포한 회칙 <영원한 아버지(Aeterni Patris)>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한 중세 스콜라 철학을 당대의 철학적・신학적 기초로 삼도록 권장한 문헌으로, 신(新)스콜라주의 부흥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예수회 학자들을 로마로 불러들여, 로마에 토마스 학술원(Academia Romana di San Tommaso)을 설립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들에 대한 결정판 편집 작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회칙 <Providentissimus Deus>(1893년)을 통해 가톨릭 성경 연구의 기본 원칙을 제시하고, 일반 학자들에게 바티칸 고문서고를 개방함으로써 학문과 교회의 소통을 촉진하였다.
가장 유명한 회칙은 1891년에 반포한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로, 그는 이 문서에서 사유재산의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공정한 임금, 노동자의 권리,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로 인해 ‘노동자의 교황’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외교 영역에서도 그는 유럽 각국과 교황청의 관계 회복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당시의 정치・사회적 동향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 개방적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그는 금서 목록을 갱신하고 교회의 권위를 강하게 수호한 보수적 경건함 또한 지닌 인물로 기억된다.
역대 레오 교황들이 써 내려간 역사 위에서
지금까지 정통 신앙을 수호하는 교황의 교도권을 결정적 권위로 자리매김한 이들, 수많은 고난 속에서 교회 권위의 쇠퇴를 막아 낸 이들, 정치적 폭력과 귀족 가문 간의 암투에 휘말려 불운하게 생을 마친 이들, 황제권에 맞서 교황권을 세우려 했던 이들, 교회 개혁과 수도회 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이들, 로마를 물리적・영적으로 지키려 노력했던 이들, 그리고 르네상스의 문화와 부패를 동시에 상징하게 된 인물들, 또 근대 사회의 양심으로 불린 이들까지. ‘레오’라는 이름을 지닌 열세 명의 교황이, 교회 역사 속 빛과 어두움, 상처와 희망을 함께 간직한 채 써 내려간 연대기를 살펴보았다.
레오 14세는 그 모든 이름의 기억 위에 서 있다. 이제 레오 14세는 교황이라는 직함보다 더 깊은 것을 지닌 사람으로 주목받는다. 하버드의 길 대신 페루의 산골을 선택했고, 고요한 희생 속에서 교회와 함께 숨 쉬는 법을 배운 이. 그는 수학 교사였고, 선교사였으며, 보편 교회의 목자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길은 단지 극적인 삶의 반전이 아니라, 교회가 오늘의 세계 안에서 어떤 리더십을 증거해야 하는지를 선명히 보여 준다. 그는 이제 단지 전임자들의 이름을 계승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름에 담긴 신앙의 유산과 시대적 책무를 자신의 교황직 안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보여 주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그가 택한 교황명 ‘레오’는, 정통 신앙을 수호한 사도적 교도권의 상징(레오 1세)이자, 교회가 현대 사회 구조 속에서 책임 있는 윤리적 주체로 발언하기 시작한 전환점(레오 13세)을 모두 품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단순한 전통의 수호자가 아니라, 기술 문명과 정치 질서, 경제 정의와 생태 위기라는 복합적인 현실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할 지혜와 용기를 요구받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새 교황이 자신의 이름을 통해 교회가 어떤 권위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응답할지를 미리 암시했다면, 이제는 그 이름에 걸맞은 ‘사목적 실행’과 ‘예언자적 선포’를 통해 이를 입증해야 할 것이다. 사실 레오 14세는 추기경단 앞에서 한 첫 공식 연설에서 이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래서 저는 제 교황명을 레오 14세로 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황 레오 13세께서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회칙을 통해 제1차 산업 혁명이라는 새로운 시대에 사회 문제를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인공지능의 발전과 제4차 산업 혁명이라는 새로운 흐름 안에서, 인간 존엄과 정의, 노동을 수호하기 위한 가톨릭 사회 교리의 보화를 전 세계에 제시하고자 합니다.”
만일 레오 14세가 자신의 교황직을 통해 베드로 사도의 목자적 권위와 현대 교회가 지닌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균형 있는 길을 걸어간다면, 그의 교황명은 단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미래 교회에 부여된 소명에 대한 신앙적 응답이 될 것이다. 교황의 이름은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기도이며, 시대가 하느님께 올리는 탄원이다. 이제 우리는 레오 14세라는 이름 아래, 그 기도의 응답을 기다린다. 하베무스 파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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