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노사제의 죽음을 기억하며

신학 칼럼

또 다른 노사제의 죽음을 기억하며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이의 삶”

2025. 05. 27
읽음 139

얼마 전에 있었던 신부님의 장례 이후, 꼭 일주일 뒤에 또 한 분의 신부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출신의 백요한 신부님이셨습니다. 다른 신부님들께서는 아이고, 살아 계실 때도 그렇게 잘 챙기시더니, 먼저 떠나간 후배 신부님 챙겨 주려고 뒤따라가셨구먼.’이라고 말씀하시며 백 신부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저도 백 신부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기에, 그분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사실이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백 신부님께서는 19536월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한국에 오셨습니다. 서울 용산 본당에서 짧게 보좌 기간을 보내고 대전 교구로 내려오신 뒤, 돌아가실 때까지 대전 교구의 사제로 계셨습니다. 1999년에 은퇴하신 뒤에는 대전 목동에 위치한 거룩한 말씀의 회에서 성사 전담 사제로서 머무셨는데, 여기에서 저와 신부님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제 출신 본당은 거룩한 말씀의 회 수녀원과 담장 하나를 끼고 있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옆에 계시는 백 신부님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고, 군대를 다녀와서는 방학이면 신부님께 꼭 한 번씩은 인사를 드리러 갈 정도의 사이가 되었습니다. 신부님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고, 고작 방학 때 식사 한 번 하는 것이 저희 만남의 전부였지만, 저는 그 짧은 만남을 통해서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참 겸손하셨습니다. 이미 50년 넘게 사제 생활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하셨습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학사님~” 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시던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참 한결같으셨습니다. 성사 전담 사제로 살면서 항상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셨고, 정해진 일과에 맞추어 하루하루를 보내셨습니다. 오후 세 시가 되면 항상 수녀원 성당이 아닌, 저희 본당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하며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셨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파이프 담배에 담뱃잎을 꾹꾹 눌러 담아 맛있게 피우셨고, 소화제라며 베네딕틴이라는 이름의 독주를 꼭 한 잔씩 내놓으셨습니다. 과음이나 과식, 일탈과 같은 단어는 신부님과 정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처럼, 신부님께서는 한결같은 고요함과 평화를 지니고 일상을 살아가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참 가난하셨습니다.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유일하게 즐기시는 것이라곤 파이프 담배와 베네딕틴이 고작이었습니다. 돈을 모아두셨다가, 당신께 인사 오는 신학생이나 신부들에게 용돈으로 건네주셨고, 남몰래 교구 사회복지국에도 봉투를 건네곤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선종하신 뒤, 신부님 방의 책상 위엔 백만 원이 들어 있는 봉투가 있었는데, 하얀 봉투에는 사회복지국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교구 사회복지국장 신부님께선 당신께서 졸지에 백 신부님의 유언 집행인이 되었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는 지금도 백 신부님과의 첫 번째 식사가 아주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신부님과 미리 약속을 잡고 사제관 벨을 눌렀는데, 신부님께서 문을 열고 나오셔서는 저를 데리고 수도원 밖으로 향하셨습니다. 수녀원 옆에는 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신부님께서는 학교 인근의 분식집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시더니, 2,500원짜리 햄 야채 볶음밥 두 개와 소주 한 병을 주문하셨습니다.

 

저희는 학교 앞 분식집에서 볶음밥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소박하지만 충만한 오찬을 즐겼습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식사를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식사를 딱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저는 그 식사라고 답할 것입니다. 까마득한 후배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과연 신부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집 앞 분식집으로 향할 수 있을까?’ 지금도 저는 종종 이렇게 묻곤 합니다. 신부님과의 식사를 통해, 손님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대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참다운 가난과 겸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거의 세 시간에 달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프랑스 그르노블에 자리한 카르투시오회 수도원의 일상을 담담하게 담아낸 작품이었지요. 대사 하나 없이, 대침묵으로 일관된 그 영화의 후반부에는 수사님들의 얼굴을 한 분 한 분 확대해서 보여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미 적지 않은 나이의 수사님들의 얼굴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환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며, 기도하고 일하고 잠자는, 지극히 단순한 일과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티 없이 맑은 눈을 지닐 수 있게 된 것이겠지요.

 

그 뒤로 백 신부님의 얼굴을 볼 때면, 그 영화에서 보았던 수사님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아이처럼 하얗게 빛나는 얼굴에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 순수한 소년 같은 미소를 지닌 백 신부님을 보면서, ‘교구 사제도 이렇게 봉쇄 생활을 하는 수도자의 얼굴을 지닐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신부님의 삶 안에서 드러난 어린아이 같은 단순성과 겸손이 그런 얼굴을 가능케 한 것이겠지요.

 

저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그런 얼굴을 지니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지 좀처럼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장례를 치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신부님께서 그런 삶을 살아갔던 것은 인간적 노력이나 의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몸에 밴 습관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신부님의 삶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가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종말론적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에게 세상은 참고 견뎌 내야 하는 시련이나 시험이 아닙니다. 그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면, 이미 천국은 그 안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방식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이 지루하고 따분한 삶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백 신부님께서 당신의 삶을 견뎌 내셨다라는 느낌을 저는 단 한 번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저 아주 자연스럽게, 물이 아래로 흘러가듯이, 당신의 하루를 평범하고 소박하게 지내셨습니다. 그 삶을 보며 제가 느꼈던 자유와 평화는, 하느님 나라를 이미 지상에서 살아가는 이의 그것이었습니다.

 

한 주 전에 돌아가셨던 다른 선배 신부님의 모습이 문득 떠오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했던 무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 신부님의 마음속에도 종말론적 희망이 가득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서, 그렇게 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으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분은 무모하리만치 열정적으로, 다른 한 분은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으로 당신들의 삶을 살아내셨지만, 두 분의 가슴속에 타오르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희망이었겠지요. 너무도 다른 삶의 방식이었지만, 이제는 그 안에 담긴 같은 형태의 희망을 보게 됩니다. 이제는 저에게 물어볼 차례입니다.

 

과연 내 안에는 그 희망이 타오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정말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

 

하느님께서 저를 부르시는 자리가 어디인지, 두 선배 신부님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Profile
대전교구 사제. 독일에서 카리타스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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