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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분 안에 만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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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놀라운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 한 문장은 마르코 복음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스승이나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복음서 속 인물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그분의 참된 정체성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와 가치가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지 못합니다(마르 4,35-41; 6,1-6; 6,51-52; 8,14-21; 8,31-33 등 참조).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시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시며, 무리를 먹이셨지만, 번번이 당신의 기적을 본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침묵을 명하셨습니다(마르 1,43-45; 5,34; 7,36; 8,30; 9,9 참조). 그분의 정체는 소문 속에서만 떠돌았고, 제자들과 사람들은 그분의 진정한 본질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신비와 오해가 뒤섞인 분위기 속에서, 복음서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으로 가는 길에 갑작스레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카이사리아 필리피
예수님의 질문이 던져진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갈릴래아 외곽, 시리아와 접한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합니다. 아름다운 헤르몬산 기슭에 있는 이 고대 도시는 바알 숭배의 중심지였으며, 나중에는 그곳에 신전이 있던 그리스 신 판의 이름을 따서 파니아스로 불렸습니다. 현재는 바니아스로 불리는 지역입니다.
헤로데 대왕은 황제를 위한 웅장한 대리석 신전을 건립하였고, 그의 아들 헤로데 필리포스는 이 도시를 본격적으로 헬레니즘 도시로 확장하고, 황제를 기리기 위해 카이사리아로 개명했습니다. 기원후 66년에서 70년 사이의 전쟁 기간에 이 지역은 팔레스타인을 침공하는 로마 군대의 집결지이자, 로마 군인들의 휴식과 휴양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지역 유다인들은 학살당했고, 유다인 전쟁 포로들에게는 잔혹 행위가 자행되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지리적 배경이 아니라, 우상의 제의, 로마 제국의 권력과 신격화, 역사적 폭력의 기억이 얽혀 있는 장소였습니다. 마르코는 바로 이 공간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을 배치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르코 복음서에서 “사람들”은 대개 하느님의 계시가 가려진 이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 29,13을 인용하시면서 ‘사람의 규정’으로 하느님을 헛되이 섬긴다고 하셨고(마르 7,7 참조), “사람의 전통”은 하느님의 계명에 어긋난다고 하셨습니다(마르 7,8 참조). 그분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마르 9,31 참조). 이러한 흐름을 볼 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의 대답은 이미 그것이 거짓이거나, 기껏해야 편파적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제자들은 들은 소문을 그대로 전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르 8,28)
사실 제자들이 전하는 대답은 마르코 복음 6장에서 전하는 추측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헤로데가 들은 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마르 6,14-15)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 사이의 이러한 소문은 이미 예수님의 역할이 특별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제대로 드러내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ㄱ)라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베드로는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ㄴ)
그리스도는 메시아, 즉 “기름부음받은 자”입니다. 구약에서는 왕, 사제, 예언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것은 왕, 특히 다윗의 기름부음입니다(1사무 16,13 참조). 다윗의 집안이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는 약속(2사무 7,11-16; 이사 55,3 참조)은 다윗 왕조의 왕이 올 것이라는 기대로 이어졌습니다(이사 9,5-6; 11,1; 예레 23,5 참조).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희망에는 종종 이스라엘을 속박에서 해방시킬 왕,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염원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곧바로 선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이르셨다."(마르 8,30) 이것은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폭로했을 때와 같은 반응입니다(마르 1,25; 3,11-12 참조). 베드로에게 '엄중히 이르심', 즉 꾸짖음은 그의 대답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정체가 당분간 비밀로 유지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곧이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마르 8,31)
예수님의 정체성은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목조목 반박하다가 꾸지람을 듣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받는 존재가 아니라 승리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수난의 길보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인간적인 길을 택해야 한다고 따졌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 8,33)고 꾸짖으십니다. 직역하면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그의 길을 막고 십자가의 길에 걸림돌이 되지 말고, 예수님 뒤로 가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선택지는 이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든지,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역할을 맡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는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고 고백하는가 하는 문제는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로마의 지배에 맞서 성전을 일으키려는 정치적, 민족주의적, 열광적인 분이었다면,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 대의에 동참하고 혁명에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세상의 종말을 선포하는 종말론적 예언자였다면,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모든 세속적인 추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비폭력 평화주의자라고 여겼다면 그의 제자들은 모든 폭력을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하나의 이미지로도 온전히 담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며 죽음을 이기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던져집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남들이 하는 소문에 흔들리지 않고, 내 삶의 언어로, 내 믿음의 깊이에서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고백이 내 삶을 바꾸는지, 다시금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참고 문헌
M.E. Boring, Mark: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Louisville (KY) (2012) 236–237.
W. Lane,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NICNT, Eerdmans, Grand Rapids (1974)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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