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미사는 저녁에 갈 거야

영성과 신심

내일 미사는 저녁에 갈 거야

부활절을 앞둔 나의 고해성사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

2025.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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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집사인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껏 누리는 봄을 보내고 있다.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하며 발코니를 지니게 된 것이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을 보내고 봄의 기척이 느껴질 즈음 나는 드디어 단골 화원을 찾았다. 그전 집은 거실이 확장돼, 있던 식물마저 다른 가족들에게 분양 보내야 했기에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사진 © 김금희

 

일단 화원에 입장하면 나는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고 산책하듯 한바퀴 돈다. 살지 말지 고민하지 않고 놓인 식물들을 있는 그대로 즐긴다. 그다음에는 어떤 식물을 데려갈 것인지 염두에 두고 다시 한번 살핀다. 대체로 큰 식물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초등학생만 한 올리브나무, 고무나무, 목수국, 유칼립투스…… 하지만 아파트에 들이기에는 너무 크니까 눈으로만 간직한다. 후보군을 뽑은 나는 고심하면서 바구니에 하나하나 담기 시작한다. 욕심과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순간을 지나 그날 데려온 식물들은 이랬다. 클레마티스, 크리스마스로즈, 마가렛, 디펜바키아, 강아지풀처럼 귀여운 자색 꽃을 단 양꼬리풀…….

 

집에 도착한 식물들은 욕실에서 물세례를 듬뿍 받은 다음, 하루를 지내야 한다. 혹시 벌레가 따라오지 않았는지 살피는 것이다. 확인이 끝난 다음에는 발코니에 놓이고 차례를 기다려 새 화분으로 옮겨 간다. 그렇게 새집 생활을 시작한 화분들은 뭐랄까, 성당으로 치자면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새 신자처럼도 보인다. 마른 잎 하나 없이 지나치게 꼿꼿하고 쌩쌩하기 때문이다. 독서와 강론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불굴의 집중력, 새롭게 만난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 다른 신자들처럼능숙해지고 싶은 열망.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편안해 보이지는 않는 긴장감.

 

 

어색하게 느껴지는 상태가 변화하기를

흔히 주일 미사는 오전 9, 11, 오후 6, 세 번 열리는데 교중 미사인 11시에 가장 많은 신자가 모인다. 교중 미사는 교구장 주교와 본당 주임 신부가 모든 사람을 위해 의무적으로 행하는 미사다. 체감적으로 가장 다른 점은 성가대의 유무다. 우리 본당만 그럴 수도 있지만, 교중 미사 때는 성가대가 함께해 더욱 성스럽고 격식 있게 치러진다. 새 신자 세례나 평신도 사도직 임명 등 본당 행사가 치러지는 것도 이때다.

 

세례를 받은 동기들은 다양한 시간에 미사에 참여했는데, 나는 가능하면 교중 미사에 꼬박꼬박 나갔다. 일단 루틴을 정하면 되도록 지키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고 뭔가 정식대로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작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내게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한 주를 정신없이 보내고 토요일 밤이 되면 나 내일 미사는 저녁에 갈 거야.” 하고 다짐하는 것이다.

 

집사람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저녁 미사가 사람이 적기도 하고 해야 할 일도 있고.” 하며 얼버무렸다. 그러면 집사람은 그런가 보다 하며 넘기는데 대체로는 다음 날 번복하고 평소처럼 미사를 가거나 심지어 더 일찍 가기도 했다. 그렇게 번번이 말을 뒤집는 나를 지켜보던 집사람은 대체 저녁에 가겠다는 말은 왜 하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생각해 보았다. 왜 토요일 어스름 저녁이 되면 내일은 오전 말고 저녁 미사에 갈까 갈등하는지를. 이른바 군기가 빠진 건가.

 

사진 © 김금희

그날 들여온 화분 가운데 가장 내 주의를 끈 건 디펜바키아였다. 옅은 아이보리색 무늬가 잎 전체에 번져 있고 쿨 뷰티라는 나름 개성 있는 유통명이 포장지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포트 빽빽이, 한치의 틈 없이 줄기가 들어찬 그 식물은 사실 단골 화원에서 산 것이 아니었다. 같은 날이기는 하지만 그 옆에 새로 생긴 도매점에서 들였고 그곳 식물들은 마트에 놓인 공산품들처럼 일률적인 것이 특징이었다. 살까 말까 망설이니 점원이 오천 원을 깎아 주며 신제품이라고 부추겼다. 나는 어쩌면 이 식물이 유행의 끝물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집어 들었다. 상품 가치가 떨어져 이제 곧 매대에서 사라질 운명이 아닌가 싶어서.

 

우리 집에 온 디펜바키아는 여느 식물들처럼 찬물 세례를 치르고 며칠 뒤 토분에 심겼다. 그러고 한동안 정지 버튼이 눌러진 듯 잎 하나의 변화 없이 사 온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식물이 얼른 흐트러지기를 바랐다. 일정하고 일률적이라 어색하게 느껴지는 상태가 변화하기를. 그때가 식물이 식물다워지는 순간이니까.

 

잎들이 햇볕 쪽으로 기울거나 줄기 틈 사이가 벌어져 제각각이 되고, 꽃들이 시들거나 더러는 다 저버리는 변화를 일으킬 때 나는 식물들이 완전히 적응했군, 하고 생각한다. 이제 긴장을 놓고 자기 내키는 대로 자랄 준비가 되었다고.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도 그러시지 않을까. 누군가 핀을 꽂아 놓은 듯 정해진 대로만 따르며 긴장해 있는 신자 대신 더 편안하고 느슨해진, 그렇게 하느님과 가까워진신심을 기대하시지 않을까. 그러니 내일 미사는 저녁에 갈 거야.”라는 말은 성당 생활에 어느덧 뿌리내린 나, 마리아의 자신감의 표현일지도 몰랐다.

 

 

불안으로 마음을 소진시키지 말 것.”

 어제는 시상식에서 소설가 J를 만났다. 몇 달 전 같이 심사했을 때 J는 자기가 냉담을 풀고 다시 성당에 나간 지 이 년 정도 되었다며, 다른 사람 없이 둘만 남았을 때 말해주었다. 신자였던소설가만 만나다가 실제하는 신자를 만나자 나는 너무너무 반가웠다. J는 안부 인사를 나누자마자 사순 시기 신자들의 핫 이슈인 판공성사에 대해 물었다.

부활 고해성사 보셨어요?”

그럼요, 2주 전에 봤지요.”

내가 의기양양하게 답하자, J는 좋겠다며 부러워했다. 그리스도인들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부러움과 안도감이었다.

 

고해성사는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성사로 구원과 용서를 청하는 아름다운 과정이다. 하지만 내 잘못을 돌아보고 그것을 말로 꺼낸다는 게 무척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세례를 받고 첫 고해성사를 할 때, 내 동기 중 하나는 너무 떨린다며 자꾸 순서를 뒤로 뒤로 미루며 사람들을 앞서 보냈다. 열어 놓은 창문을 내려다보며 그 동기가 가슴 위로 손을 올려놓고 불안을 견디던 모습, 그 긴장된 분위기가 지붕에 갑자기 나타난 고양이 때문에 우르르 바뀌었던 5월의 성당 풍경이 눈에 선하다.

 

지난 성탄 대축일 판공성사에서는 12.3 내란 사태로 정신이 없어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해야 하는 걸, “이상입니다하고 나왔다. (심지어 그 문구는 고해소 벽에 쓰여 있다.) 하지만 그 겨울로부터 다행히 시간은 흘러, 나는 상을 받는 젊은 작가들을 위해 축하객으로 가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부활절을 앞둔 나의 고해성사에 대한 하느님(신부님을 통해 전해진)의 말씀은 이것이었다.

 

불안으로 마음을 소진시키지 말 것.”

 

내가 미사를 오전에 갈까 오후에 갈까 하는 건 해이함의 문제가 아니라 적응의 신호일 것이다. 내가 가고 싶은 신앙의 길을 용감하게 가늠해 보고 있달까. 그렇게 해서 이주에도 나는 이렇게 선언하며 잠이 들었다. “내일 미사는 저녁에 갈 거야.”라고.

 

Profile
2009년 <한국일보>로 등단해 《너무 한낮의 연애》(2016), 《경애의 마음》(2018), 《대온실 수리 보고서》(2024) 등의 소설과 《식물적 낙관》 등의 산문집을 냈습니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분투 중이며, 밤마다 가톨릭 책을 읽다가 잠에 들어 가족들에게 ‘재야 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60여 종의 식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식집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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