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영적이고 신비스러운 삶이자, 그분의 현존하심에, 그분의 신적이고 삼위일체적인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며, 우리가 하느님 앞에 항상 서 있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면서 방해받지 않는, 우리 안에 온갖 장애물을 걷어 내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따르려는 우리의 굳은 의지이자 결의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느님과 결속되는 것이자 믿음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생생하게 이루어지는 교환, 주는 것이자 받는 것인 만큼 기도는 철저히 준비된 자세로 시작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7월 17일 삼종기도 훈화 중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던 중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한 일을 언급하며 오늘날 바쁜 삶 가운데 우리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시중받고 대접받기 위해 찾아온 존재가 아닙니다. 마르타는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방문자의 현존을 잊어버린 셈입니다. 오히려 방문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당신의 말을 ‘들어 주기’를 원해서 찾아왔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씀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존재와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 빛을 비춰 주고 길을 안내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언어의 가장 기초이자 뿌리는 ‘침묵’입니다. 몸의 침묵, 의식적인 마음의 침묵, 감성의 침묵으로 들어갈 때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또한 뒤늦게 주님의 소리를 듣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늦게야 임을 사랑했나이다. 임께서는 제 안에 계셨거늘 저는 밖에 있었고, 제 바깥에서 임을 찾아 헤매며 임께서 빚어 내신 아름다운 피조물 위로 일그러진 제 자신을 제멋대로 내팽개쳤나이다. 임께서는 저와 함께 계셨지만, 저는 임과 함께 있지 아니하였나이다. 저를 부르시고 또 부르시어 귀먹은 제 귀를 열어 주셨고, 비추시고 밝히시어 저의 눈멂을 쫓으셨나이다.”
주님과 참된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면 주님을 향하여 내면의 문을 열어야만 합니다. 숨기려고만 한다면 소통할 기회를 놓칠 경우가 높습니다. 하느님께 돌아서면, 하느님께서는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오히려 전보다 더 높은 사랑의 차원을 보여 주십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은총의 신비이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감추지 않고 마음을 열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주도권을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분께 눈길을 돌려 그 토대 위에서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나의 이야기’만이 아닌 ‘하느님의 이야기’ 또한 알게 되고 듣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시작은 회개하는 것으로부터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다시 당신께 다가갈 가능성을 열어 주십니다. 대다수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의 첫째 과제는 그들에게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음을 의식하게 하는 일인데,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무엇을 형성했는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지, 또 무엇을 감사하지 않았는지 기도의 빛 안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기도하려면 먼저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멀리한 것을 알지만, 또 그것을 너무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부분이 회개를 방해하는 요소인데, 이를테면 그것을 기도 안으로 가져올 마음을 갖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서야 할 자신을 숨기려 합니다.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겨 드리고자 하면서도, 자신에게서 멀어진 것을 잊어버리고 떠올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진실이 아닌 것에 근거를 둘 수 없고, 성찰하여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스스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음을 통찰해야, 자기 죄를 뉘우쳐야, 복음에서 나오는 ‘되찾은 아들’(루카 15,11-32)처럼 겸손해져야 그분께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베푸는 사랑을 과분한 선물로 여겼기에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이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서 느끼는 고통이 그의 영혼을 불태웠기에 비로소 은총이라는 신적 불꽃이 그 사람 안에서 타오른 것입니다.
인간이 체험하는 사랑에는 언제나 ‘자아’가 섞여 있기 때문에 ‘절대’, ‘무조건’, ‘영원’ 등의 개념과 범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사랑은 신적 본질이며 신비이기 때문에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깨닫는 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그 깨달음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은총인 동시에 그것이 하느님이 가장 주고 싶어 하시는 은총인데, 이 은총 체험으로부터 시작된 진정한 회개야말로 하느님께 대한 내적 친밀감을 발견할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그러한 회개가 하느님의 뜻이자 늘 새로운 기도의 시작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데 방해되는 여러 요소 중 감사하는 마음의 부족 혹은 결여는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받은 많은 은총 곧, 생명, 가정, 신앙, 나라는 존재 등, 이를 깨닫지 못하고 감사도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자기 자신에 대한 감사함도 느낄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그 은총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 뜻은 감사를 마치 의무처럼 여기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지 못할 때 그로 인한 죄의식이 강해질 수 있기도 합니다. 나 자신의 소중함과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감사하는 마음은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은총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주시는 것임에도, 우리가 올바르게 살면 그 보답으로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마음 또한 참된 회개를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그 은총은 하느님의 우선적인 선택이자 초대이며 선물로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임에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일 때, 그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분명히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나를 돌보아 주신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의 부족은 내적 회개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께로 향하고 그분에게서 멀어진 상태에서 돌아오는 가운데 하느님의 세계인 기도의 세계에 어느 순간 들어섰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