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살아가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행동의 욕구, 충동, 영감이 되는 어떤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모든 자손 안에 계시는 성령의 목소리며, 눈에 보이지 않은 채 먹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탈출 20,21; 사무 22,10; 시편 18,10)이고, 이 목소리 가까이에서 심연으로부터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또 다른 목소리가 일어나는데, 이는 인간 욕구의 표현이며 완전히 구별되는 ‘마음의 문 앞에서 도사리고 앉은’(창세 4,7) 죄의 목소리입니다. 이 목소리는 인간을 부추기는 본능으로 나타나며 하느님께 반대하는 존재, 악한 영의 활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당신 앞에 두 길을 제시하는데, 이는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믿음의 길과 그 반대인 불순종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선택과 식별은 평생 해 나가야 할, 반드시 필요한 길이고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길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신명 30,15-16)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명기 30장 15절에서 20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선택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으며, 자유라는 현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으며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식별은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거룩함과 진리의 영에 비추어 사건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듣고, 숙고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신앙에 비추어 이 식별에 대해 언급됩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마태 16,3)
곧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며(시편 95,7),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사도 2,7.11.17.29), 주님께 충실할 것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시대의 표징이나 옳은 일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더 깊숙이 질문의 뿌리로 들어가도록 합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이것이 우리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감정, 충동, 유혹입니다. 이를 살피고 읽고 알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내면의 식별의 기준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무엇보다 식별은 위로부터 오는 은사이며, 우리의 영과 하나가 되시는 하느님 영의 은사이고,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식별을 갈망하며 희구했습니다. 곧 식별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움켜쥘 수 있는 덕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서 오는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 사랑을 얻을 수 있도록 나 또한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룰라Rulla는 가치 내면화와 관련하여 세 가지 차원을 설명합니다. 첫 번째 차원은 도덕적 가치와 종교적 가치에 정의되는 지평으로 자신을 뛰어넘고, 자신을 포기하고, 하느님 중심적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책임 있는 차원입니다. 세 번째 차원은 기본적으로 공통적인 가치로 종합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자연적 가치의 차원이며, 주변 인간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주체가 자발적으로 발전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숙과 미성숙의 정도를 감지하는 기준이 되며, 쉽게 자연적으로 인간이 누리는 기본적인 욕구도 해당됩니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차원인데 룰라는 오늘날 세상의 역동적인 변화에 따라 단순히 하느님 중심적 가치, 자연적 가치로 구분할 수 없고 이 두 가지 가치가 혼합된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의식과 무의식이 존재하며 지배하는 자아 구조가 얽힌 결과물입니다. 룰라의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고자 합니다.
각자 좋아하는 사제, 수도자가 계실 겁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어느 날, 유독 몸과 마음이 지친 날이 있습니다. 때마침 자신이 참 좋아하는 사제, 수도자와 식사도 같이하고 커피 한 잔도 곁들인 좋은 날을 보냈습니다. 답답했던 이야기도 꺼내고 기분 좋게 다시 성당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성당 입구에 아이스크림 쓰레기가 놓여 있다면, 많은 사람이 그걸 보고 주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때 내적 일관성, 의식적으로 선함을 찾고자 하는 행동의 결과가 드러납니다. 이 성당이라는 하느님의 거처를 조금이라도 더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선의 결과에 따른 행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쓰레기를 줍는 상황 역시 고려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 쓰레기를 줍는 내 옆에는 내가 늘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제, 수도자가 서 있습니다. 그렇기에 무의식적인 가치의 추구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를 바라봐 주세요. 제가 이렇게 선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올바른 신자로 기억해 주시고 그렇게 저를 알아봐 주세요.’ 하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가치들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이 예를 든 부분에선 선이 드러났음에도 그것이 ‘외면적인 선’에 국한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에 따른 행동에 대해 ‘식별’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이 식별을 가능하게 하고 성찰할 수 있다면, 이러한 자연적 가치를 통한 자기 완성적 자아 초월이 신 중심적 자아 초월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다른 말로 실제로 내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뛰어넘는 하느님 중심적인 가치로 점차 변화될 수 있습니다.
식별한다는 것, 우리 의식 속에 식별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에도 등장하듯이 성령의 요구인 내적 요구를 각자가 따르고 귀 기울이는 데 주안점을 둡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양심에 귀 기울이고 영감, 내적 움직임, 주님의 현존과 그분 뜻을 알아차릴 수 있는 ‘감각’을 성령께 청하며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도합시다.
참고 문헌
《성경》, 주교회의 성서위원회(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5.
Alessandro M. Ravaglioli, 《Psicologia-Studio interdisciplinare della persoanlità》, EDB, 2018.
Giovanni Climaco, 《La scala》 26,1,1; 26,2,22, PG 88,1013A.
Amedeo Cencini · Alessandro Manenti, 《Psicologia e Formazione》, EDB, 2019.
프란치스코 교황(윤주현 옮김),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십시오》, 생활성서사, 2014.
아우구스티노, 《고백록》, 10권 27장 38절.
인만희, 《궁금해요, 기도!》, 바오로딸, 2024.
이시도로 리바스(옮긴이 정구현), 《기도를 잘하기 위하여》,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7.
프란치스코 교황(진슬기 옮김), 《오늘처럼 하느님이 필요한 날은 없었다》, 가톨릭출판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