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을 통해 하느님과 만나다

영성과 신심

‘성찰’을 통해 하느님과 만나다

‘죄’는 클 수 있으나, 그 죄보다 더 큰 것은 ‘하느님의 자비’

2024.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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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안에서 즐기는 기쁨을 맞이하나 싶으면 이내 줄어드는 기쁨.

행복에 들뜨면 이내 들게 되는 실망과 의심.

굳건한 믿음도 언젠가는 지나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잠기다가 다시 찾아오는 영적 기쁨.

영적 평화에 이어 그 평화를 무색하게 하는 어두움.

그러고는 마침내 하느님 안에서 맞이한 온전한 평화.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모습과 과정이 드러나는 때가 바로 ‘성찰’이 이루어진 후입니다. ‘성찰’이란 단어를 유독 자주 듣는 때가 언제일까요? 아무래도 부활을 앞둔 사순시기, ‘성탄’을 앞둔 대림시기일 것입니다. 판공성사를 앞두고 우리는 평소보다 성찰을 더 자주 하려고 노력합니다. 여기서 성찰에 의미를 다시금 확인해 보려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찰은 자신이 한 일을 되돌아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면서 우리가 고해성사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피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성찰은 ‘오늘 하루 하느님께서 과연 어떻게 나와 동행하셨는지, 내 옆에서 어떻게 도와주셨는지, 하루를 살면서 나는 하느님과 어떻게 삶을 만들었고 어떠한 길을 함께 걸었는지 되돌아봄’을 의미합니다. 이 안에 나의 잘못된 부분, 선하지 않았던 내적 상태 등을 떠올리고 이를 뉘우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찰’이라고 하면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만 떠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내가 나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동시에 하느님과 하루하루 어떻게 동행하며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볼 수 있음은 복된 축복입니다. 죄를 바라보고 느끼며 가던 길을 되돌려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 축복의 의미를 ‘죄’라는 타이틀에만 가두어 놓아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성찰할 때 주의해야 할 태도는 지나친 자기혐오와 미성숙한 자기 비난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훌륭하게 만들어 주지 않으셨다거나, 나를 돌보아 주지 않으신다는 생각에 나를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판단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자기 노력의 결과로만 받아들이고 생각한다면 ‘교만’일 수 있지만, 모든 것이 하느님과 함께했다고 믿고 느낀다면 이는 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독 자신의 장점을 인정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불어 하느님의 사랑을 배제한 상태로 자신의 잘못을 지나치게 비난하거나 자신을 지나치게 부끄러워하는 것 또한 그리스도교적 가르침과는 다른 입장입니다. 심리학적으로 ‘굴종의 욕구’와 관련 있을 수 있는데 움츠리고, 자기 속으로 끌려들어 가며, 자기 비하적 태도의 굴종의 욕구는 겸손한 태도, 착한 태도,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포장되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죄’는 클 수 있으나, 그 죄보다 더 큰 것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그 죄를 넘어서 실제로 하느님께서 내 삶 안에서, 나의 내적 양심 안에서 어떻게 당신이 자비하신 분이신지 체험하도록 부르심에 초대받습니다. 이러한 무한한 하느님의 축복인 ‘자비’를 이용하는 것 또한 위험한 결정이고 행동이지만, 지나치게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계속해서 비난하는 것은 미성숙한 자기 비난적 태도입니다. 그러니 나의 결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실제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성찰을 시작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해야 합니다.

 

 

성찰과 함께 이루어져야 할 ‘식별Discernimento’

 

사실 수도 생활과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영성 안에서 ‘식별’이라는 용어는 늘 존재했습니다. 사막의 교부들 또한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그리스도를 따라 걸어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으로 이 ‘식별’을 선택했을 만큼, 모든 덕의 최고이자 성령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신 은사입니다. 어원적으로 ‘여럿을 놓고 꼼꼼히 살피다’, ‘아주 주의 깊게 지켜보다’를 뜻합니다. 식별은 한계와 무지로 특징지을 수 있는 우리 인생에서 삶의 방향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행하는, 깨어 있는 관찰과 신중한 실험을 통해 실현되는 앎의 활동이며 과정입니다. 이는 선택의 어려움, 의혹, 불확실함을 체험할 때, 또는 일상에서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방향을 찾을 때 발생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활동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상황들을 마주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식별’이란,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시는 것처럼’(로마 8,16) 그의 영적 삶 혹은 공동체의 삶을 이끄시는 성령과 자신의 영이 서로 협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식별은 성령의 은사, 은총의 활동이라는 중개가 필요한 여정입니다. 창조의 역사의 사건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요한 클리마코는 식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초심자에게 식별은 자기 자신을 아는 탁월한 지식이며, 여정 중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식별은 순전히 자연적인 선과 그 반대되는 것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영적 감각이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에게 식별은 신적인 조명을 통해 얻은 지식이며, 자신의 빛으로 다른 이들에게 덮여 있는 어둠을 비출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식별은 모든 시간, 장소, 상황에서 확실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학자 주세페 안젤리니Giuseppe Angelini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식별은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알게 해 주는 정신의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식별은 우리에게 다음의 것들을 알아차리게 해 준다. 우리 편에서 움직여야 하고, 결정을 내릴 줄 알고 또 그렇게 해야 하며, 결국 우리가 처한 다양한 상황이 우리에 관한 것이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 과정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는 것이다.”

 

결국 식별이란 선택하고 결정하며 바로 지금 의식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힘겹고 다양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수행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식별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보고 알고 느끼고 판단하고 행하기 위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근본이 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성찰과 식별을 토대로 우리는 올바른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고, 또 그 상황 속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기도는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식별은 ‘이상적인 자아Io ideale’와 ‘현실적인 자아Io attuale’를 명확하게 구분하도록 도와줍니다. 예를 들어 실제로 내가 오르간 연주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오르간으로 연주된 곡을 많이 듣게 되고, 자주 접하면서 곡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직접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곡을 자주 들었다 해서 오르간을 잘 연주하길 바라는 것은 이상적인 나의 바람이자 이상적인 나의 모습입니다. 이때 ‘이상적인 자아’가 생깁니다. 현실적으로 내가 노력하지 않고 배우고자 하지 않는다면 오르간 연주를 들을 순 있을지언정 오르간을 연주하진 못합니다.

 

여기서 ‘이상적인 자아’와 ‘현실적인 자아’가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상상을 통해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창조하고 그려 보기도 합니다. 내가 갖지 못한 모습들, 능력들이 나에게 주어지길 바라면서 그 모습을 내 모습의 일부로 생각하며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만든 허상의 이미지일 뿐, 실제의 내 모습은 아닙니다. 여기서 명확하게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또 지금 나에게 어떠한 것이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식별’입니다. 기도 생활 또한 이와 같습니다.

 

단순히 바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아닌, 그 바람이 이루어지려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기도하는, 참된 지향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진실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위해서 명확하게 구분하고 판단할 수 있는 힘, 더불어 그 바람이 실제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성령께서 도우심을 느끼고 그분께 맡길 수 있는 은사가 바로 ‘식별’입니다.

Profile
인천교구 사제. 교황청립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사제양성을 전공했습니다.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 영성 지도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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