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의 신학으로의 초대: 신학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신학 칼럼

교의 신학으로의 초대: 신학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신학자, 신앙을 살아가는 사람

2026. 05. 05
읽음 73

1

2

 

🌟 <평신도를 위한 교의 신학 가이드> 시리즈의 두 번째 문을 여는 글입니다. 앞선 네 개의 글을 확인해 보세요.

 


 

📙 INTRO

 

<평신도를 위한 교의 신학 가이드> 시리즈는 독자에게 교의 신학의 중요한 꼭짓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20258월에는 초대 교회 교의의 형성 및 정립 과정을 살펴보았고, 20265월에는 신학이 가지는 생동감과 이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교회의 삶’을 안내할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평신도에게 신학은 고리타분하고 일상과는 동떨어져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신학의 출발점은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행위에서 출발한 신학을 이성을 사용하여 체계화한 것이 바로 교의 신학입니다. 이는 신학이 숙련된 소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의 것임을 뜻합니다. 따라서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신앙을 살아가야합니다. 사회를 살아가는 평신도에게도 예외는 없습니다. 평신도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하느님께 던지는 질문과 응답 모두 삶의 신학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신앙을 살아갈 때, 교회 역시 생동감이 넘치게 됩니다. 교회는 친교 안에서, 참여를 통해, 사명을 향해 함께 걸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살아 움직이는 방식, ‘시노달리타스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무엇보다 세상의 중심에서 복음을 전하는 평신도가 교회와 함께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식별할 수 있기를, 함께 걸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낯설지만 가까운 이름, ‘신학

 

신학(Theology)이라는 말을 들으면 먼저 무엇이 떠오르나요? 두꺼운 먼지가 쌓인 책에 기록된 고리타분한 개념들, 혹은 일상과는 동떨어진 복잡한 신학 용어들이 떠오를지 모릅니다. 그래서 신학은 흔히 전문 신학자들의 전유물처럼 보이거나, 넘기 힘든 높은 장벽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신앙의 진술들은 우리와는 다른 시대 속 다른 언어의 맥락 안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들은 당연히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신학은 결코 우리 삶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신학의 출발점, ‘사랑하면 알고 싶어지는 마음

 

신학의 출발점은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이미 교회 안에서 고백되고 살아 있는 공통의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매 주일 미사에서 사도 신경고백을 통해 교의1)를 선포합니다. 삼위 하느님을 고백하고, “그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백의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 근거는 교회가 받아들이고 읽고 살아가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에 있습니다. 세상의 문화와 시대 정신은 쉼 없이 변하지만, 성경이 전하듯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히브 13,8)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같은 복음을 고백하면서도, 그 복음이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새로움을 늘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더 알고 싶어지고, 그를 향해 자신을 내어 주고 싶어집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이며,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결단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그분은 누구이신가?”

왜 나는 그분을 믿는가?”

이 믿음은 내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그분이 내 삶의 중심이 되는 순간, 이처럼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을 향한 신학적 물음을 멈출 수 없게 됩니다. 이 질문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신학도 함께 시작됩니다. 다시 말해, 신학은 설명하기 위해 덧붙이는 이론이 아니라, 믿는 이들 자신이 고백하는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한 성찰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단순한 지적 작업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신학은 믿음 바깥에서 이미 증명된 학문이 아니며, 믿음을 만들어 내는 작업도 아닙니다. 신학은 믿음의 행위에서 출발하여, 그 믿음이 고백하는 내용을 분명히 하고, 더욱 성숙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겸손한 삶의 태도입니다.

 


 

신앙이 이성과 손을 잡고 걷는 길

 

신학이 믿음의 행위에서 출발한다면, 교의 신학은 그 믿음을 학문적 형식안에서 체계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는 주체는 인간의 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의 신학 안에서 이성은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이성은 모든 진리를 스스로 밝혀낼 수 있다는 오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신앙의 빛에 자신을 맡깁니다. 왜냐하면 신학은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에서 이성이 홀로 고군분투하면서 얻어 내는 결과물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건네진 계시와 사랑에 응답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성은 신앙과 대립하지 않고, 신앙의 빛 안에서 계시의 의미를 밝히는 능력(ratio fide illustrata)으로 사용될 때2), 진리를 향한 겸손한 안내자가 됩니다.

 

이러한 신학적 역동성을 아름답게 보여 준 인물로 삼위일체의 가르멜 수도회의 엘리사벳 성녀(Élisabeth de la Trinité, 1880-1906)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엘리사벳 성녀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뜨거운 신앙으로 신비의 심연을 바라봤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짧았던 생애 안에서도 단순한 종교적 경이로움을 체험하는 것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성을 모두 이용해 자신에게 현존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지성으로 성찰했고, 그 결과 우리 영혼의 천국에서, 성삼위에 대한 영광의 찬미3)라는 깊은 통찰에 도달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녀는, 이성이 신앙의 빛 아래에서 얼마나 맑고 섬세해질 수 있는지를 증언합니다.

 

사실, 삼위일체 교의는 단순히 숫자에 얽힌 신비로운 논리가 아닙니다. 한 분이시며 세 위격으로 계신 하느님을 머리로만 이해하려 할 때 신비는 멀어집니다. 그러나 성부·성자·성령께서 우리와의 관계안에서 활동하심을 깨닫는 순간, 삼위일체 신앙은 자신의 내면과 인간 공동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바꾸어 놓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라는 고백이, 관념을 넘어 내 삶의 고통과 기쁨 속에서 요동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미 신학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배를 띄운 것입니다. 그녀에게 신학이란, 이해가 되어야 믿겠다.는 고집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고백처럼, 신앙이 앞장서고 이성이 그 뒤를 따르는 아름다운 여정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녀에게 이성은 사랑하는 하느님의 신비를 더 정교하게 맛보고 고백하기 위해 봉사하는 다정한 조력자였습니다.

 

이성은 자신을 절대화할 때보다 믿음에 자신을 맡길 때, 오히려 하느님의 계시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한하신 하느님을 유한한 인간의 그릇에 다 담을 수 없다는 겸손한 한계를 인정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성이 신앙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인간의 이성이 하느님의 신비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개념 안에 모두 담길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언제나 유비(類比)’를 통해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의 모습에 빗대어 신비를 설명하되, 그 유사성 너머에 훨씬 더 큰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교의 신학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무릎을 꿇는 겸손이 공존하는 거룩한 성찰입니다. 엘리사벳 성녀처럼, 교의 신학은 믿음의 빛 안에서 이성을 사용하여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하고 그 깊이를 더듬어 가는 행복한 여정입니다.

 


 

신앙을 사는 사람, ‘신학자

 

신학은 누구의 것일까요? 몇몇 전문 신학자들만의 영역일까요? 신학은 결코 소수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비록 신학은 학문적 형식을 지니지만, 그 출발점과 목적은 언제나 교회가 고백하는 믿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의 신학은 새로운 믿음을 발명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내 안에 심어진 신앙의 씨앗이 무엇인지 이성의 빛으로 세밀하게 살피고, 그 발견을 삶의 구체적인 선택과 사랑으로 꽃피워 내는 여정입니다. 결국 신학의 완성은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갈망이 나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삶이 다시 하느님을 증거하는 빛이 될 때, 우리는 이미 세상 한복판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학을 써 내려가는 삶의 신학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신학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던지는 여러분의 진실한 물음과 그 물음에 응답하는 매 순간의 삶, 그 모든 것이 바로 교의 신학의 길입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 각주

1) ‘교의’(Dogma)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가운데 교회가 신앙으로 반드시 믿어야 할 내용으로 최종적·권위적으로 선포한 진리를 뜻한다.

2) 1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드님(Dei Filius), (DH 3019).

3) 로슈훨 가르멜 여자 수도원《침묵의 영혼 복녀 삼위일체의 엘리사벳》성서와 함께, 2006. 69그녀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고마침내 2016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성되었다.

 


 

🔍 함께 보면 좋은 아티클

 

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전공했습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그리스도론, 은총론, 교회일치 신학을 가르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정 속에서 길잡이가 되는 신학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다른 분들이 함께 본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