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제 이야기] 저를 부르셨습니까?

영성과 신심

[새 사제 이야기] 저를 부르셨습니까?

“나를 따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까지

2026.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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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제가 여기 있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오랫동안 이 질문을 주님께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나를 따라라.”는 부르심은 나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의 사랑 안에서 참된 자유를 발견하라는 초대였다는 것을.

 


 

나를 따라오너라.”(마르 1,17)

 

신학생 시절부터 좋아하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 드라마가 최근에 cpbc+에서도 방영을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는데요. 바로 달라스 젠킨스(Dallas Jenkins)를 필두로 제작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더 초즌(The Chosen)’입니다. 고증에 충실하면서도 예수님과 그 주변 인물들의 모습, 감정선을 생생하고 사실감 있게 그려 내는 것이 이 드라마의 매력입니다. 마치 바로 앞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듯한 생동감은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다고 납득시키는 동시에, 살아 있는 감동을 전해 줍니다. 그리고 그 생생함은 기도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렇게 기도와 미디어의 생동감을 통해 제 심금을 울렸습니다. 하느님의 다양한 말씀은 여러 방식으로 다가왔죠. 그중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제 마음을 울린 장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었습니다.

 

나를 따라라.”(마태 8,22; 9,9; 마르 2,14; 루카 5,27; 요한 1,43)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 마르 1,17)

 

이 부르심은 일차적으로 모든 신자를 향한 일대일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저를 부르시는 구체적인 길에 응답하도록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매일 이 사제직 안에서 확인할 때마다 참으로 큰 복을 누리고 있음을 느낍니다.

 

저 단순하고도 짧은 말씀은 복음서에서 그리도 많이 언급됩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 말씀이 깊이 박혀 있었다는 이야기이겠지요. 어떤 느낌인지는 저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느낌을 처음부터 제 마음이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저는 귀먹었고 돌처럼 굳어 있던 한 청년의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열려라!”

 

에파타!”(마르 7,34)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를 열어 주시고 그 혀를 풀어 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귀가 막힌 것처럼 자신을 향하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성소에 관한 문제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저에게 사제 성소가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청년 시절, 성경을 읽거나 묵주 기도를 하면서 주님의 승천을 묵상할 때,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말씀이 특별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이 말씀을 접하면서 문득 사제로서의 삶에 대한 끌림을 느끼곤 했습니다. 또 오상의 비오 성인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삶에 대한 끌림과 호기심, 동경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곧바로 생각을 돌려 버렸습니다. 평신도도 그러한 삶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실제로 거룩한 삶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돌이켜보면, 하느님께서는 계속 저를 부르셨지만 제가 귀를 닫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스물넷이 되던 해, “신학교 생각은 없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물음에 나는 무조건 결혼할 것이다.”라고 응답하던 청년이 뜻밖에도 스물다섯에 예비 신학생 모임에 처음 들어가게 되었고, 그다음 해인 스물여섯에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닫힌 귀를 조금씩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에파타!”라는 한 마디에 귀가 열린 복음 속 인물과는 달리, 제 귀는 너무나도 더디게 열렸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정말 즐겁게 지냈습니다. 동료를 통해, 기도를 통해, 학문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가끔은 행복하기도 했습니다. 생활 리듬도 저와 잘 맞았습니다.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항상 불안하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정말 성소가 있는 것일까? 주님께서 정말 나를 부르신 적이 있었을까? 밖에서의 삶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나는 아직 이를 포기하지 못한 것 같은데…….’

 

지금 신학교에서 그럭저럭 지내는 것이 사실은 그 삶이 나에게 맞아서, 그래서 편하게 느껴져서 그냥저냥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좋아했지만, 성소에 대한 불확신이 마음 한편에서 저를 계속 괴롭혔습니다. 그 불안은 성소가 없다면 앞으로 사제직을 통해 주님께 모든 것을 헌신하는 청빈, 정결, 순명의 삶을 끝까지 살아 낼 수 없을 텐데.' 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성소에 대한 의심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저녁 성무일도를 하다가 문득 무언가에 걸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문밖으로 나가려다 문지방에 발이 턱하고 걸리는 듯한 생생한 느낌이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절박하게 기도했습니다. 정말 제가 여기 있기를 원하십니까?” 신학교에 들어온 뒤 수년 동안, 어떤 답을 들을지 두려워서 단 한 번도 직접 여쭤 보지 못한 질문이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의문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그렇다.”였습니다.

 

제가 감히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분명히 저는 예수님을 언제나 좋아해 왔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시다니, 그때부터는 뒤돌아볼 모든 여지가 사라졌습니다. 오직 사제직만을 향해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의 확신이 저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 후로 아예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맥락에서의 확신 안에서, 주님의 도움을 끝없이 받으며 모든 난관을 하나둘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주님의 말씀들이 더욱 생동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말씀과 부르심들에 마음을 연 순간, 진실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새 사제로서 첫발을 걸어 나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동안 저는 그 질문에 항상 머뭇거렸습니다. 그분을 사랑한다고 대답하면 정말 다 내려놓아야 할 것만 같아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저 기도와 선택의 시기를 기점으로,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그런 저에게 주님께서는 지난 24, 서품식을 통해 이렇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너는 나를 따라라.”

 

모든 사건을 겪은 베드로에게 마지막에 나를 따라라.”(요한 21,19) 하신 주님의 말씀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들은 말씀과 같으면서도 새로운 말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제 저에게도 복음서들 초반에 나왔던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이 새로운 차원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불과 9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입니다. 아직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르심 안에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안배하신 제 자리에서 머무르는 행복을 계속 누리고자 합니다.

 

부르심에 마음을 열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 복음서 말미에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

 

정확히 대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저는 제가 기웃거리고 싶은 곳으로 다녔고, 계속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저를 데려다주시는 곳으로 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충실함과 신실함을 끝까지 성장시켜 줄 은총을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라고 응답할 사람만 예견하셔서 부르시지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입니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 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청년은 슬퍼하며떠나갑니다(마태 19,21; 마르 10,21; 루카 18,22 참조). 분명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이르십니다. 하지만 최종적인 선택은 그 청년의 몫으로 남겨 두십니다.

 

성소는 강압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성소가 나에게 무엇이 좋은지 가장 잘 아시는 분께서 베푸시는 부르심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확실한 것은, 성소는 그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할수록 완성된다는 점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느님의 안배에 대한 순응과 로서의 주체성. 세상은 둘을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듯합니다. ‘홀로 서 있는 나로서의 에고(ego)를 키우게 하고 순응이라는 개념에 반감을 품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참된 주체성은 하느님의 말씀과 섭리에 나를 온전히 순응시킬수록 참으로 완성됩니다. 주체적으로 살라는 세상의 이야기 뒤편에는 미묘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류는 하느님의 뜻에 순응할 때 얻을 수 있는 참행복을 보지 못하게 우리 눈을 가립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에고가 커지는 것이 미덕인 시대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의 뜻에 내 뜻을 일치시키는 것은 내 자주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증진하는 것이고, 이때 비로소 참으로 자유로워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부르심에 맞는 삶에 헌신하기로 하고 그 은총을 받아먹으며 살아가는 이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얻습니다. 그 모든 것의 근간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청소년과 청년 여러분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로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을 사랑합시다. 주님을 알고 사랑합시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기쁨을 누려 봅시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내 자리에 대해 마음을 열어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과의 진실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솔한 대화가 우리의 참된 성소를 발견하게 해 줍니다. 그 안에서 참으로 성소를 발견하고 개발해 나간다면 우리는 평신도로서,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의 삶을 진실로 온전히 이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소, 거룩한 부르심이란 아이템처럼 쥐고 있는어떤 독립체가 아니라 하느님과 나 사이에서 매 순간 이루어지는 생생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과 응답이라는 그 일대일 관계의 축복이 모든 독자에게, 그리고 한국 교회와 모든 보편 교회에 풍성하게 내리기를 기도해 봅니다.

 


 

🙏 함께 기도해 주세요.

 

<사제의 첫 계절>은 새 사제들의 첫 사목과 신앙의 여정을 함께 나누는 연재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전해 준 이학주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주님의 부르심에 끝까지 충실하며, 맡겨진 양들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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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의정부교구 사제. 별내성당 부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단순하고도 깊은 영성을 본받아, 하느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비우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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