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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움이 나를 갉아먹을 때에는 잠시 거리를 두고 마음을 지켜봅니다.
다만 그 거리가 완전한 단절로 굳어지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시간 안에서 다시 사랑을 선택해 보세요. |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절의 일이다. 전염병 예방을 위해 성당의 문마저 걸어 잠가야 했던 그 시절, 내가 사목했던 본당 신부님께서는 신자분들이 미디어를 통해 미사를 드린 후 마당에 오면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몇 주간 서로 만날 수 없던 신자분들에게 마스크를 쓰고 조심스럽게 성체를 분배하며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미사가 끝난 뒤 마당을 나서는데, 한 할머니 신자분께서 서성이고 계셨다. 나는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고 그동안 잘 지내셨냐며 다가갔다. 할머니께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하셨다.
“아유, 이렇게 나를 환영해 주는 신부님을 오랫동안 볼 수 없어서 힘들었지 뭐. 나를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은 세상에 둘밖에 없어.”
손주나 자녀일 것이라 짐작하면서도 나는 장난스레 샘이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말고 할머니를 이렇게 환영해 주는 분이 또 계세요?”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하셨다.
“누구긴 누구야, 카페 아르바이트생이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대답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라 생각했지만, 마당을 서성이며 나를 기다리셨다는 사실 때문에 그 말씀이 쉬이 잊히지 않았다. 할머니의 외로움과 고독함이 짙게 배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의 알맞은 협력자다
인간관계에는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답과 반응을 받으면 좋겠지만, 늘 기대한 대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은밀하게 털어놓은 생각이 혹시라도 왜곡될까 두렵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알 길이 없으니 막막하다. 내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을까 봐 걱정도 된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이 내 마음을 후벼 파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워지기도 한다. 그런 일을 겪을 때 치미는 분노를 삭이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꽁꽁 문을 잠근 채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국 누군가를 찾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다는 느낌, 고독하다는 느낌은 실로 우리를 괴롭게 만든다. 나 역시 그렇다. 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많은 일정과 모임에 지쳐 방학을 기다리다가도, 신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교정은 유난히 쓸쓸하고 텅 빈 것 같아 적응하기까지 몇 번의 방학을 보내야만 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타인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관계는 어렵다. 실제로 본당에 있을 때 종종 이런 하소연을 듣기도 했다. “신부님, 저는 복음 말씀을 기꺼이 따를 수 있어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요.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도저히 지킬 수가 없어요.”
특히 가족 관계에서 회복할 수 없는 마찰이 생기거나, 신앙생활 가운데 미움이 생겨날 때 우리는 매우 당혹스럽다. 가족 관계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골을 전제한다. 신앙생활에서의 미움은 공동체에서 봉사할 때, 일과 봉사 사이의 괴리 속에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이러한 어려움에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어떻게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에게 수많은 상처를 준 이에게 다가가 기꺼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이해한다며 끌어안아야 할까. 아니면 제발 나를 사랑해 달라고 읍소해야 할까. 도무지 하느님 말씀의 뜻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예수님이 이렇게 몰라주시다니 서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다. 원수를 사랑하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 미움이 너 자신을 갉아먹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주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7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행실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이해하라는 뜻이 아니다. 심판과 정죄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 미움과 판단이 우리의 내면을 병들게 한다는 걱정 가득한 사랑의 경고이다. 원수 사랑은 단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따뜻한 초대이기도 하다.
이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의 도성De civitate Dei》에서,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사랑하느냐에 따라 영혼이 질서를 이루거나 무너지기도 하며, 특별히 미움과 정죄는 그 질서를 뒤틀어 영혼을 혼란에 빠트린다고 경고한다.
“평화는 질서의 평온이며, 질서는 각 사물이 제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미움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도저히 누군가가 견딜 수 없이 미울 때는 굳이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는 한다. 쳐다만 봐도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 질서와 평온이 깨져 버린다면, 그것은 나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그 자리를 피하되, 굳이 마음속 화를 다시 상기하지 말 것.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나의 영혼을 지킬 것.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최선의 선택이라면, 시간의 흐름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길 것. 굳이 험담할 필요도 없고, 애써 기억을 더듬어 내 안의 화를 돋울 필요도 없다. 그러한 것들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라는 말씀과 거리가 먼 행위다. 한편 그렇게 자리를 피함으로써 내 마음의 평온이 유지된다면 우리의 상처는 점차 아물게 된다.
기억해야 할 것, 치열하게 사랑할 것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의 거리 두기가 관계의 완전한 단절로 굳어져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는 화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순간순간 억울함에 분노가 치미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니. 그럴 때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좋겠다. “주님, 저 사람도 당신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고, 제 마음의 분노를 씻어 주소서.” 그러면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미움은 사그라질 것이다. 이처럼 원수 사랑은 감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에 머물지 않겠다는 결단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흐르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는 행위이다.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다. 이전의 상처와 아픔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만남까지 거부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는 큰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그만큼 또 다른 기쁨을 가져다준다.
내가 우려한 것과 달리 좋은 반응이 오기도 하고, 기가 막히게 내 마음을 눈치채고 해결해 주는 누군가가 나타나기도 하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를 더욱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 늘 주위에 있다. 누군가 가만히 건넨 말에 한없이 위로받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러고 보니 분노를 삭이는 것만큼이나, 치열하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역시 온전히 나의 몫이다.
사랑의 경험이 반복되면 나 혼자만의 시간보다 다른 이들과의 소중한 시간이 더 기다려지고, 문을 활짝 열고 파티라도 열고 싶어진다. 그리고 많은 이들과 사랑의 만남을 가지셨던 십자가 위 예수님의 말씀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명형진 신부, 문재상 신부, 방종우 신부,
심재현 신부, 은성제 신부, 이한석 신부의 신앙 이야기를 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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