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약 성경의 기록과 교부들의 성찰에서 ‘의사이신 그리스도’가 실현하신 구원과 건강에 관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교부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건강, 질병, 치료법에 기여하며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하고 안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를 헤아리며 인간의 건강과 구원에 관심을 기울인 교부들의 성찰을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글 | 파블로 다미안 오이오Pablo Damián Oio (코르도바 가톨릭 대학교)
“건강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가장 소중한 선물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전통적으로 구원과 건강 사이의 밀접함과 그 안의 상호적이고 다양한 의미를 항상 강조해 왔습니다. 저는 교부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구원 사업을 지칭하던 칭호인 ‘그리스도 메디쿠스Christus medicus’, 즉 의사이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상처 입은 양을 돌보고 병든 양을 위로하는 선한 목자이며, 길가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연민에 이끌려 치료하고 돌보는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치유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는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던’ 하느님의 아드님의 사랑과 동일시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6년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이 연설 속에서 건강과 구원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건강, 질병, 구원에 대한 교부들의 생각을 총망라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글에서는 관련 주제에 대한 교부들의 관점을 전반적으로 제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교부들의 사상에 따른 질병의 치료와 치유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는 특정 질병의 치료법을 자세히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에서 치유로 나아가는 움직임, 즉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통한 사람의 회심과 치유의 움직임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구원과 치유
교부들은 건강의 개념이 욕정을 다스리거나 미덕을 실천하는, 사람의 심리적 차원을 의미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 타인, 모든 피조물과 건강한 상호 작용을 추구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먼저 교부들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주요 개념을 정의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리스어 소테리아sotería와 라틴어 살루스salus는 구원, 해방, 악 또는 불행의 극복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에는 이 개념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단어는 샬롬shalom(웰빙, 평화)과 베라카beraka(번영, 축복)입니다.
프랑스의 정교회 신학자 장 클로드 라르셰는 소즈sώzw(구원하다)라는 동사가 위험에서 구출하거나 구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치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한편 스트흐리아swthrίa(구원)라는 단어는 해방뿐만 아니라 치유를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은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마태 1,21; 사도 4,12 참조)’, 즉 치유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의사로 언급하셨으며, 이는 복음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마태 8,16-17.9,12; 마르 2,17; 루카 4,18.23 참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의사이신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교부들이 바라본 예수님
이제 건강과 질병에 대한 각 교부들의 관점과 이에 대한 미묘하면서도 다양한 차이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탈리아의 심리학자 산드로 스핀산티(1992)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의사로 언급하는 것은 이미 사도 교부들에서 발견됩니다. 라틴 교부 중에는 히에로니무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경우 병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신성한 의사가 주도권을 잡는다고 생각합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의사는 오직 한 분이시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말합니다(《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7장 참조). 아우구스티누스는 치유에 사용되는 약은 쓴맛이 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는 포기와 고통의 쓴잔을 가장 먼저 마셨다고 이야기하며(《설교집》 88,7), 의사를 인간의 본성을 치유하는 자로 보았습니다. 의사는 구원의 은유적 표현입니다. 교부들은 구원을 설명하며 구세주가 치유를 행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히에로니무스는 “병과 상처는 육체에 대한 것이지만, 죄는 영혼에 대한 것이다.”라고 밝힙니다(《(펠라기우스파 반박 대화》 3,11). 암브로시우스는 고행을 의학적으로설명하며 “상처는 의사를 찾고, 의사는 죄를 인정하라고 요구한다.”라고 말합니다(《시편 해설》 40,14).교부들에게 건강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도달해야 할 완벽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미덕을 지니지만, 하느님의 계획에는 인간의 참여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대부분의 교부는 미덕을 얻게 되는 역동적인 특성을 설명할 때 형상과 모상을 구별합니다. 형상은 하느님을 닮을 가능성, 잠재력을 말하며, 모상은 그 형상이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바실리우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인간의 기원에 관한 강해》 1,16).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형상과 모상, 우리는 창조를 통해 하나를 소유하고, 의지를 통해 다른 하나를 얻는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태어날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우리의 의지를 통해서만이 우리 안에 하느님의 모상을 가진 존재가 만들어진다. 우리의 의지에 달린 그것은 우리 본성에 내재되어 있지만,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 실제로 나는 형상을 통해 이성적 존재를 얻었고,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그 모상을 갖게 되었다.”
모든 교부는 아담이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묘사합니다. 창세기에는 아담이 낙원에서 하느님과 대화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가자의 이사야스에 따르면, 낙원의 인간은 “타고난 상태 그대로 건강하고 안정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라고 합니다(《수덕집》 2,2).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주님의 기도 강해》에서 “고대에는 상상하는 바와 같이 인류가 건강을 누렸는데, 영혼의 움직임을 뜻하는 요소들이 미덕의 법칙에 따라 우리 안에서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4,2). 낙원 같은 상태는 인간이 영혼과 육체에 모두 질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죄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목표를 더는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고, 진정한 본성과 삶을 잊고 태초의 건강을 잃었습니다.
리옹의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형상과 모상이 나타났다고 밝혔습니다(《이단 반박》 5, 2.3.16, 2).
“이 모두가 진실임은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몸소 사람을 닮으시고, 사람도 그분을 닮게 하셨을 때 증명되었으니, 사람은 아드님을 닮게 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귀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고대에는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다.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씀이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하느님의 모상은 쉽사리 잊혔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을 때(요한 1,14 참조) 두 가지가 확인되었다. 몸소 사람의 형상을 띄시면서 참형상을 보여 주셨고, 눈에 보이는 말씀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모상처럼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 우리에게 모상을 회복시키고 확고하게 하셨다.”
예루살렘의 키릴루스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사로 보내신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세례 교리교육》 12,7.8).
“인류의 상처는 매우 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온전하지 않았다. 거즈나 기름, 붕대를 둘 공간도 없었다. 그때 예언자들은 애통함과 고통 속에서 ‘누가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시편 14,7 참조)라고 말했다. …… 인간의 상처는 우리 치료법보다 더 강하다. ‘그들은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1열왕 19,10) 악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며, 악을 피하려면 당신이 필요하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들의 간구를 들으셨다. 아버지께서는 멸망의 길에 있는 우리 민족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주님이자 의사로 하늘에서 아드님을 보내셨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어떤 부자가 구원받는가?》에서 의사 그리스도,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게 구세주 외에 누가 또 있겠는가? 많은 상처와 두려움, 욕망, 분노, 슬픔, 속임수 (그리고) 쾌락으로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에게(에페 6,12 참조) 거의 죽을 뻔한 우리를 주님 외에 그 누가 더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겠는가?”
*이 글은 스페인 학술지 <Razón y Fe>에서 발췌 및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원문 출처 ■
Oio, P. D. (2023). Salus: Salud y salvación en la ciencia y en los Padres de la Iglesia
<Razón Y Fe> 287(1461), 131–150.
https://revistas.comillas.edu/index.php/razonyfe/article/view/19498
https://doi.org/10.14422/ryf.vol287.i1461.y2023.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