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성, 하느님의 선물

신학 칼럼

내면성, 하느님의 선물

<십자가의 성 요한과 내면성의 발견> 3화

2025. 0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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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사상을 인간 내면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저자는 어둔 밤의 경험이 주는 주된 결과를 통해 자신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알게 되며,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고려하여, 인간 내면의 완전한 성숙을 위한 신비로운 길로서 어둔 밤을 제안합니다.

 

| 아나 실베이라Ana silveira (교황청립 살라망카 대학교)


초월적 개방성으로서의 사랑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사랑을 단순히 인간의 본질을 장식하는 추가 요소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자질을 지향하고 지시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영혼의 노래Cantico espiritual》에서 나는 사랑하는 연습만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힘과 감각의 정화에 대한 그의 모든 가르침은 사랑에 대한 능력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정화의 목표는 다름 아닌 인간에게 하느님을 향한 초월적인 개방성이라는 단 하나의 근본적인 성향을 남기는 것입니다. 동시에 《어둔 밤》의 주된 견해는 인간의 가장 깊은 존재, 즉 인간의 본질에 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 성인에 따라 사랑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를 고려합니다. 첫 번째 요소는 타자성이고, 두 번째 요소는 개인적 역동성입니다. 이 관계는 대화를 통해 표현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대화하는 것이며, 그 사람의 발견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인간에게 진정한 사랑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통해 사랑이 주입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미숙한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는 수많은 대상으로 의지가 분산되어 안식을 찾지 못하고 불안해집니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영적인 것을 포함한 만물을 지휘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신에게 다가가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힘을 정화해야 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다음 구성 요소도 주목할 만합니다. 인간은 창조되고 구속된 존재이며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조되었으며, ‘육체, 영혼, 정신을 가진 유일한 존재로 사랑 앞에 평등하다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인간이 타락했다는 가정에서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유한성을 고려합니다. 본성의 불완전성과 죄 자체가 하느님을 대하는 인간의 능력에 큰 상처를 입혔다는 점에 근거하여 그가 원죄를 전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도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삶 전체를 감싸는 유한성과 죄에 관한 관점에서 출발하여 어둔 밤이 요구됩니다.

 

밤은 체질적 재생을 일으키고, 모든 존재는 새로운 형태로 깨어나, 자기 뿌리에서 재창조됩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인간적이고 영적인 인간의 충만함, 즉 하느님과의 결합으로 이어지는 길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성숙의 과정이며, 이러한 전인격의 변화는 신학적 덕목인 믿음, 희망, 사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학적 차원에서는 통제의 법칙에 지배되는 폭력적인 인간을, 철학적 차원에서는 초월을 포용하지 못하고 초월할 수 없는 자기 안에 갇힌 고독한 인간을 떠올립니다. 결과적으로 내적 통일성을 상실하면 사람들은 중심을 잃고 자기 경험을 자기 것으로 살아 내지 못합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닥친 일이나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휩쓸리기 때문에 자기 삶과 활동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자신이 경험하는 것들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되는데, 그것들을 분별하는 데 필요한 거리를 확보할 만큼 충분히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 능력도 상실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합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자신을 개방한 후에 내면을 향한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거리를 두면,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립니다. 그것을 인식하면 나는 다시 내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것이므로, 고요함이나 몰입, 공허함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의 진리를 향해 가고, 그 진리와 접촉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어둔 밤의 첫 번째 발견은 자기 인식으로, 이때 성령이 영혼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책임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행동, 심지어 최선의 행동조차도 이기심과, 하느님과 형제자매들 앞에서 목격한 사랑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빛이라는 점을 알고 있으며, 빛이 침투하면서 우리 자신이 생각보다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이 밤을 통해 평화의 기쁨, 하느님에 대한 일상적인 기억과 간청, 영혼의 청결과 순결, 미덕의 실천이라는 네 가지 유익을 얻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과 자신과 이웃에게 온유해져서, 스스로에게 범한 자신의 잘못과 이웃에게 범한 타인의 잘못에 대해 더 이상 화내지 않으며, 하느님에게 불만을 느끼거나 무분별한 다툼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항상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자기중심의 그물에 얽매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빛에 비추어 예리하게 죄를 인식하는 것이 하느님을 통해 영혼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결과임을 인식한다면 상황은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더 강렬하고 영혼의 능력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현존은 어떤 면에서 모든 고난의 원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밤이란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 즉 영혼의 눈을 멀게 하고 본래의 시력을 빼앗는 눈 부신 빛에서 나오거나, 나무를 태워서 영혼을 검고, 추악하고, 악취 나게 만드는 불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새로운 희망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게 되고, 하느님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밤을 통과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유익함과 이로움을 전해주므로 또한 복된 모험입니다. 자신의 비천함과 비참함은 물론, 하느님의 위대함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은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는 치유의 과정으로서, 사랑의 만남을 위해 사람을 준비시킵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연인이신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타인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작업선 상에 항상 존재합니다. 타자성은 하느님과 자신과 이웃에 대한 영적 온유함의 이로운 점에 더해집니다. 겸손의 미덕을 통해 사람은 교만이라는 악덕에서 비롯된 모든 불완전함에서 정화됩니다.

 

여기에서 이웃 사랑이 태어납니다. 그는 타인이 아닌 자신만을 뜨거운 열정으로 바라봤던 예전과는 달리, 이웃을 존중하며, 이웃을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그의 눈앞에는 자신의 비참함만 보이므로, 그 비참함에서 벗어나지도, 다른 어떤 것에도 시선을 주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 그에게는 자기 영혼의 보화가 완성된 것처럼 보여서, 이웃에 대해 할 말이 없거나, 할 말을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비참함을 알게 된 고통으로 다른 사람들의 보화에 대해서는 벙어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어둔 밤과 내면으로 가는 길

마리아 막달레나의 경험과 유사한 경험에서 출발하면 거룩한 것은 종교적 틀 안에 갇혀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의 모든 차원에서 발산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지녔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재가 나타나는 곳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밤은 하느님의 부재를 하느님의 진정한 이미지를 되찾는 기회로서 이해하는 열쇠를 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구유에서 태어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랑의 이미지, 일반적으로는 승리주의의 형태로 표현되지 않는 이미지가 하느님께서 정말로 전달하고 싶으셨을 이미지일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신앙과 이성의 정신은 우리가 위기의 시대를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내면으로 가는 길은 궁극적으로 의미를 찾는 것이므로 정신적, 철학적 또는 영성적 차원으로 축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가장 큰 보물인 내면의 잠재력을 가졌지만, 이 보물은 숨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가꿔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인생에 따라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결정적인 단 하나, 사랑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틀 안에서라면 내면성에 희망찬 미래가 있다고 믿습니다. 내면성 자체가 하느님의 신비로 들어가기 위한 하느님의 첫 번째 선물이자, 우리 각자가 가는 길과 초대받은 길을 보기 위해 해석해야 하는 첫 번째 노트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스페인 학술지 <Salmanticensis>에서 발췌 및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원문 출처 ■

Silveira, A. (2022). La interioridad humana y san Juan de la Cruz. Camino de salida y de llegada.

<Salmanticensis> 69(1-2), 181202. https://revistas.upsa.es/index.php/salmanticensis/article/view/404

https://doi.org/10.36576/summa.147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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