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사상을 ‘인간 내면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저자는 어둔 밤의 경험이 주는 주된 결과를 통해 자신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알게 되며,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고려하여, 인간 내면의 완전한 성숙을 위한 신비로운 길로서 어둔 밤을 제안합니다.
글 | 아나 실베이라Ana silveira (교황청립 살라망카 대학교)
최근 ‘내면성’이라는 단어는 특히 종교 분야에서 모든 문명이 수천 년 동안 발전시켜 온 대체할 수 없고 환원할 수 없는 인간의 차원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말과 해석이 난무한 신성한 공간을 거부해 온 동시대인들은 이제 이 차원을 갈망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내면성 없이는 가장 깊은 영역에서 제한을 받고, 무한한 것에 좌지우지되며, 본능에 휩쓸리거나, 행동이 자동화되는 일종의 기계화에 휘말려 스스로 동물화되고 만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내면의 삶을 가꾸어야 할 필요성
실제로 삶에는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 층의 깊이가 있으며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더 깊은 곳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가능성을 가졌지만, 그 어느 때보다 불만족스럽다는 현대의 역설을 인식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내면성’에 대한 연구가 현실을 더 많이 드러내는 동시에 인간관계의 공간을 열어 줌으로써 근본적인 타자성에 대한 존중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인간 내면성의 함양은 이용당하거나 떠밀리지 않고도 타인이 자신의 환원될 수 없는 신비 속에서 인정받을 수 있게 해 줍니다.
따라서 거리를 두면 상대방의 얼굴을 발견하고 존중하며, 나와는 다르더라도 상대방의 욕구, 관점의 타당성을 더 세밀하고 섬세하게 파악하게 됩니다. 내면성은 외면성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수불가결한 보완재이자 검증의 장이며 기준입니다. 사실 내면성이란 도피가 아니라 자유와 명료함을 얻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이기 때문에 내면성이 커지면 외면성의 깊이도 드러납니다.
이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통합된 삶의 방식은 이냐시오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관상가가 되는 것 또는 만물을 지탱하고 불러일으키는 현존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여 모든 차원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영적 체험에는 인간이 저마다 개인적으로 배워야 하는 여러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침묵 없이는, 또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에 대한 어떤 실제적 지식 없이는 영적 체험을 시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면성은 외부에 열려 있고 역동적입니다. 내면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사람을 만나고 질문을 받고 변화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윤리적 또는 심리적 훈련이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인 훈련이며, 더 큰 전체에 자신을 내맡기는 길입니다. 따라서 내면성은 자만심을 조장하는 것과 거리가 멀며, 어둔 밤의 어려운 여정을 돌아보지 않고 통과하고, 심지어 변화된 모습으로 그 여정을 나오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영성은 종교적 실천과 관련하여 항상 내면 세계를 고려했습니다. 영성은 세계관, 윤리, 과정을 제안하고, 그 과정의 발전을 통해 내면성이 발휘됩니다. 결과적으로 내면의 삶을 가꾸어야 할 필요성은 종교와 다양한 인본주의에서 시작되어 20세기 후반 문화에 점점 더 많이 대두됩니다. 금세기는 인류학과 ‘나’의 세기였습니다. 그러나 ‘내면성’이라는 용어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내면성’은 ‘외면성’과 결합된 경우에만 유효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마르셀 레고Marcel Légaut는 《내면성과 헌신Interioridad y compromiso》에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내면성에서 비롯되는 헌신이 중요하다는 점을 언급했습니다.
또한 내면성은 주관성, 경청, 느낌, 수용성 및 인식의 조건이 발견되는 근본적인 차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곳은 자신을 알고자 하는 영역이며, 다른 행동을 환영하는 곳입니다. 내면 세계는 우리가 외부 세계로부터 받은 것이 공명하는 곳이며, 생각하고 성찰하는 곳이며, 하루 종일 받은 영향을 처리하고, 때때로 자신의 근본적인 취약함을 인식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따라서 사람에게 가치가 있다면 그의 존재는 누군가가 느끼는 호감도와는 무관합니다. 이 가치를 소유하는 것은 자신이므로, 다른 사람의 경험에 절대로 의존하지 않습니다. 독일 철학자 힐데브란트Dietrich von Hildebrand는 왜 가치 있는 모든 존재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자격이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가치’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어떤 근본적인 존중을 요구하거나 받을 자격이 있으며, 신은 숭배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힐데브란트가 “가치에 대한 반응”이라고 부른 것은 이러한 존재에 대해 마땅히 보여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시작될 때 나를 내게 주신, 주도권을 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재를 위해 내려진 이 결정은 일반적인 것은 아닙니다. 인간 종의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이 민족, 이 시대, 이 문화, 이 조건에 속하는 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의 의지를 뛰어넘어 누군가가 내가 이 시대에, 지금 이 시간에, 이곳에 존재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자기 수용은 “나는 정말로 나이고 싶고, 오직 나이고 싶다.”라는 반응과 과제를 전제로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소명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도록 부르심을 받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자신의 현실과 유한성, 한계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자신을 받아들여야 할 때 자신을 재창조하려고 하므로 평화롭지 못합니다. 20세기 철학적 실존주의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어느 정도 강조함으로써, 예를 들어 죽음이 인간을 허무로 위협한다고 단언함으로써 이러한 인류학적 문제에 직면해 왔습니다. 그러나 유한성을 신앙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하느님의 피조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감사는 분명한 반응이며, 스스로 드러나는 사랑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겸손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받은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선물에 대해서도 우리는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고 친밀하며 자유로운 사람은 상대방의 사랑에 특별한 감사를 느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상대방의 사랑과 유사하다는 것을, 즉 상대방의 사랑에 대응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 사랑에 놓인 요구 사항은 대응입니다. ‘나-너’의 관계는 관계와 인간 사랑에 결정적이고 안정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절대자 너와의 만남으로 가는 길이여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각 개인은 영원한 당신에 대한 관점을 열게 됩니다. 사실 희망을 빼놓고 대인관계를 말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에서 진정한 희망은 사랑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숨결과 같으며, 희망은 상대방에 대한 믿음, 그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행위라고 말합니다. 희망은 고통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기대와 신뢰는 희망의 기본 요소입니다.
사랑의 개념을 개방성이라고 인정할 때, 우리는 인간 조건과 구속의 신비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으므로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이 그에게 드러나지 않고, 그가 사랑을 만나지 않고, 사랑을 경험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그의 삶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모습에서 그가 사랑의 학교의 스승임을 감지합니다. 그는 시적이고 이성적인 두 가지 관점에서 사랑에 접근합니다. 이성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에게 결정적인 답을 준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자기 뿌리에서 ‘타자’를 향해 자신을 투영하는 데 목적이 있으며,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경우에 ‘타자’는 하느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입니다.
*이 글은 스페인 학술지 <Salmanticensis>에서 발췌 및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원문 출처 ■
Silveira, A. (2022). La interioridad humana y san Juan de la Cruz. Camino de salida y de llegada.
<Salmanticensis> 69(1-2), 181–202. https://revistas.upsa.es/index.php/salmanticensis/article/view/404
https://doi.org/10.36576/summa.147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