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사상을 ‘인간 내면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저자는 어둔 밤의 경험이 주는 주된 결과를 통해 자신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알게 되며,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고려하여, 인간 내면의 완전한 성숙을 위한 신비로운 길로서 어둔 밤을 제안합니다.
글 | 아나 실베이라Ana silveira (교황청립 살라망카 대학교)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이야기한 ‘밤’은 많은 민족과 종교의 신화와 시적 전통에 상징으로 존재하는 현상입니다. 이 성인의 사상을 내면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이에게 내면의 삶을 수련할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 주제 전체를 다루기란 불가능하기에 성인의 생각을 현시대에 ‘내면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사회적, 윤리적, 지적, 영적 위기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현실을 재발견하고, 표현하며, 자신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그 현실을 변화시키도록 격려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예수님의 죽음 이후 첫 제자들이 받았을 당혹스러움을 현재와 비교하며 살펴보겠습니다.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는 열린 마음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분의 시신을 돌보기 위해 그곳에 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그녀의 마음과 꿈은 골고타 언덕에서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이제는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향유를 뿌릴 시신만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했을 때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영적 체험을 통해 자신이 목격한 사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요한 20,11-18 참조). 이제 이 전체 이야기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의 경험은 많은 사람이 걸어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20세기 몇몇 작가들은 신의 죽음을 선언했습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많은 문화적 영역에 신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신이 죽은 것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그의 시체가 도난당했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체험과 유사한 영적 체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황량함이라는 우리 문화의 특징에 맞서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내면성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마음을 ‘여는 것’, 소통하는 것
오늘날 세계에는 이러한 교훈이 점점 더 필요합니다. 사물의 깊은 곳에는 새로운 차원이 존재하며, 그것을 들여다볼 때 자신과 타인, 하느님을 이해하고 의심하거나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회적이고 순간적이며, 피상적인 관계의 우리 문화는 공허함과 소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삶과 현실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따라 내면의 삶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면성의 발견을 자기중심주의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종종 내면성은 편안함, 몰입, 의식 확장, 행복의 성취와 같은 정서적인 자기만족의 형태로 제시됩니다. 내면성에 대한 탐구가 우리를 사회적 책임에서 고립시키고, 개인주의를 확산시키고 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윤리적 주체로서, 즉, 무관심할 수 없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존재로서, 내면성에는 타자성에 대한 언급이 불가피하게 포함됩니다. 그들이 없다면 인간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될 가능성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내면성을 지칭하는 다른 용어로는 지혜와 통합의 자리를 뜻하는 ‘레브leb’(마음)가 있습니다. 마음이 있기에 우리는 듣고 분별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주님께 “듣는 마음”(1열왕 3,9)을 청했을 때, 그는 세상을 이해하게 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마음은 의지, 계획, 결정 및 의도의 기관입니다. 기억의 보물이 충실히 저장되는 곳도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여는 것’은 소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을 아우르는 존재를 발견하는 데서 출발할 것입니다. 그 출발점은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우리가 하느님의 시선 아래 있는 내면의 세계, 이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가려면 ‘골방으로 들어가’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하고, ‘문을 닫은 다음’ 떠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마태 6,6-13 참조). 성경은 아브라함 이후부터 ‘고향’(창세 12,1)을 떠나는 내적 순례의 역동성에 익숙합니다. 거기서부터 자신의 실존적 현실과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식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외부에 남겨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떠나야 할까요?
침묵과 고독
우선 조용히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침묵을 유지하기 위해 조용히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침묵하는 경우가 있고, 나의 겉모습과 거짓된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순수한 감성적인 침묵이 있습니다. 이처럼 침묵은 또 다른 목소리가 되지만 개방성, 겸손, 신뢰가 필요합니다. 침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내면성은 다른 것과 차별화됩니다.
복음서는 침묵이 경청과 시간을 내주는 태도로 여겨지는 또 다른 차원으로 내려가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원하시고 우리 존재를 찾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기를 은근히 꺼립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고독과 침묵’에서 받는 선물은 ‘완전한 타자’에게 이끌리는 경험입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 있으며 우리 마음과 접촉할 때 누군가가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믿음의 확신을 통해 우리 안의 어둡고 무질서하거나 혼란스러운 모든 것과 연결되는 두려움을 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문을 닫다.”라는 복음 속 표현은 내면성을 침범할 수 없는 내밀함의 공간으로 시각화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공간이 알려지거나 공유될 가능성은 전적으로 우리 자유에 달렸습니다. ‘침묵’ 속에 있다가 외부로 돌아온 사람은 마음에 새겨진 예수님의 낙인을 지니게 되고, 이 현존과의 접촉을 통해 타자성의 관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시선 아래에서 사는 법을 아는 사람은 모두 형제자매가 되기 때문입니다(갈라 6,17 참조).
기도
두 번째 방식은 우정의 관계로서의 기도, 즉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인 것을 아는 사람과 종종 단둘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관계의 하느님이시며, 기도의 핵심은 바로 관계입니다. ‘기도oratio’는 어원에 따르면 본래 경청으로 이해됩니다. 기도는 경청을 뛰어넘고 초월하는 친밀한 관계로 분명히 이어집니다. 존재의 근원에서 우리는 경청하고 응답해야 한다는 본래의 욕구를 마주합니다. 신은 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로, 내면 깊은 곳에서 발견해야 할 내적 근원이자, 기도를 통해 말을 건네야 할 타자로 경험됩니다.
진정한 영성을 향해
내면성의 경험에서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영성은 육체나 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본모습 그 자체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의 표현처럼 “만물에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는 것”으로서, 우주적, 역사적, 인간적 현실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전에는 영혼을 소중히 여겼지만, 오늘날 우리는 육체를 지나치게 우상화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과 피조물 전반에 대한 진정한 시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영적인 삶은 대인관계나 돈, 시간, 직업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이 ‘신성한’ 것과 관련될 뿐이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과는 무관하다는 사상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삶의 모든 차원에 스며드는 돌봄의 윤리가 절실합니다. 이는 책임의 관점에서 하느님께 충실한 삶을 수반합니다. 충실함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전부를 책임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스페인 학술지 <Salmanticensis>에서 발췌 및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원문 출처 ■
Silveira, A. (2022). La interioridad humana y san Juan de la Cruz. Camino de salida y de llegada.
<Salmanticensis> 69(1-2), 181–202.
https://revistas.upsa.es/index.php/salmanticensis/article/view/404
https://doi.org/10.36576/summa.147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