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있다. ‘쿵’을 말하면 ‘짝’하고 돌아와 소리가 날 만큼, 나의 말에 마음 깊이 공감해 주고 복잡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몇 마디 말을 통해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정돈되는 기분을 느낀다. 복잡했던 마음이 평안해지고, 그간 묵혀 두었던 상처가 사라질 때도 있으며, 사랑이 자라나고 희망이 피어난다. 그와 나누는 대화는 답답했던 어둠 속 터널을 지나다 마주한 불빛과도 같으며, 막막한 도로를 헤매다 얻게 된 지도와 같이 답답함을 해결해 준다.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그 마음은 정반대로 작용한다. ‘쿵’ 하고 이야기하면 ‘짝’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벽에다 소리치듯 그 소리는 다시 ‘쿵’ 하고 내 귓가를 때린다. 끝없는 터널 속에서 빛을 찾지 못할 때도 있고, 복잡했던 마음은 더 불편해지고, 답답했던 마음은 해결되지 않은 채 진공 상태에 놓인 것처럼 머물러 있다.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은 비단 우리 시대의 일만은 아니다. 소통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닌 통교의 수단인 대화를 통해 가능해진다. 대화가 권위적이었던 예전에도, 그리고 요즘은 대화에서 권위라는 거품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지만 개인만이 그 의미를 드러내 대화를 회피하거나 대화의 범위를 소수에서 개방하지 않으려는 현상들은 이 시대에도 통교를 가능케 하는 소통의 수단인 대화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초대받는다.”(〈사목헌장〉, 19항)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란 얼마나 설레는 말인가. 인간 사이에 나누는 대화는 기쁨과 행복도 있지만 때로는 상처가 더 크게 남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를 그려 본다면 그분은 나에게 상처를 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분과 나누는 대화는 나와 잘 통하는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보다 깊고 아름다우리라 그려진다.
우리의 하느님은 그것을 가능케 하신 하느님이다. 우리 하느님은 당신의 세계에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시다. 흔히 발견하는 신화 속 신神은 인간사를 걱정하지 않는다. 신은 권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의 권위는 인간과 구분되어 신의 영역만의 특별함을 드러내는 신적 권위다. 고용인이 고용주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을진대, 우리 하느님의 모습은 달랐다. 신은 그 이상으로 인간과 분리되어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오히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어 인간에게 말을 거셨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어렵사리 입을 떼어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를 부르시는 그분의 목소리는 대화의 시작이었다. 응답해야 하는 이는 당황스럽기 그지없고 부끄러워 나설 수 없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대화의 시작은 벌을 위함이 아닌 구원을 위한 수단이었다. 지배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용서하기 위한 대화의 시작이었고, 사랑하기 위한 대화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 자꾸만 대화를 끊어 버렸다. 하느님께서 걸어오시는 대화에 응답하지 않을 때도 있었고, 그것이 율법이 기록된 책 안에 모두 담겨 있다고 맹신하기도 했다. 대화는 점점 메말라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시어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싶으셨던 하느님은 용단을 내리셨다. 당신 아들을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내려보내 인간들과 대화하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 자리에 초대하시는 분이시며, 대화 자리에 미리 앉아계신 분이시고, 대화 자리를 두드리는 우리의 노크 소리에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대로 예수님은 우리게 하느님의 마음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만남을 이루었다. 우리 가운데 사신 말씀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다. 그분과 나누는 대화는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사이에 철통같이 나누어져 있던 구분의 문을 열어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는 장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심은 당신 자신을 나누어 주시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하시어 인간에게 보내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말과 행위로 인간에게 다가오셨고, 그것으로 인간에게 대화를 건네셨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건네신 대화에 참여한 인간은 구원을 얻게 되었다. 참된 행복을 알게 되었고(마태 5,3-12), 치유되었으며(루카 5,12-16), 생명의 빵을 얻게 되었다(요한 6,22-59).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마르 1,15).
예수님은 인간과 대화가 잘 통하는 분이셨다.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그분께서 인간에게 오셔서 보내신 삶의 모든 여정은 인간과 나누는 대화였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분은 대화를 끝내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인간과 나누는 대화는 끝날 수 없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대화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용서로(루카 23,42-43),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1베드 3,18-19) 끊이지 않았다. 나아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현장에서의 본격적인 대화의 시작을 알리시며 부르신다.
“마리아야!”(요한 20,16)
우리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초대하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의신학의 중심이다. 하느님과 인간과 나누는 대화인 신학을 인간이 이뤄 갈 수 있게 해 주신 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인간의 눈높이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셨고, 그 대화를 통해 인간은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을 보게 되었고, 듣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육화(肉化)이자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인간으로 탄생하신 강생(降生)이며, 그분께서는 사람이었기에 죽으셔야 했지만 하느님이셨기 때문에 죽음을 이기심을 드러내 보여 주신 구원의 파스카 사건인 부활에 있다.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에 우리 모두는 초대받았다.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를 가능케 하는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