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답이 뭔데요?”
정답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1 더하기 1은 2라고 딱 떨어지는 답을 원하고, 사람의 행동마저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여 정해 주기를 원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가름 지어 명확한 답을 찾기를 원한다. ‘1 더하기 1이 2일 수도 있다’는 말은 불확실한 대답이 되기 때문에 답이 될 수 없고, 정답을 답변하지 않으면 문제로부터 틀린 답으로 평가된다.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에도 우리는 이러한 사고에 젖어 들 때가 있다. 이해하기에 다소 벅찬 다양한 교리를 접할 때가 그러하지만, 특별히 구원에 대한 교리를 예로 들 수 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은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신앙은 다가올 구원의 영광을 보증해 주는 것이며(《가톨릭 교회 교리서》, 163항), 특별히 “교회는 영원한 행복에 들기 위한 확실한 보증으로 세례 이외에 다른 방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1257항)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인 영원한 행복이자 영원한 생명은 세례를 통해 이미 우리의 삶을 통해서 시작되었고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 보고”(1코린 13,12), “그분을 있는 그대로”(1요한 3,2) 보게 될 다가올 ‘지복직관’의 순간에 앞서 그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보증이란 말 그대로 확실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증명하는 것이지 확실함이 이미 성사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지녔던 확신이 이루어지는 날을 ‘완성’이라 부르며 우리는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영광의 구원을 향한 여정을 걷고 있다(〈교회헌장〉, 48항).
이러한 가톨릭의 구원관을 들으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는 거예요, 받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며 되묻는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고(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우리는 구원의 확실한 보증을 받은 거예요.”라고 하면 다시 이어지는 반복되는 질문에 갇히게 된다. 둘 중 하나의 명확한 답을 원하며, 나아가 “그럼 구원이 언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라며 확실한 시점을 궁금해하기도 한다. 이 또한, 구원의 결과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으로 얻어질 결론이기에 구원은 약속되었고, 우리의 믿음으로 확실히 보증되기에 믿음을 키우자고 독려해도 정확한 답을 원하는 이들은 “그래서 결국 언제……?”라는 풀리지 않는 문제처럼 그 답을 궁금해하고 답답해한다.
하느님께로부터 우리가 받은 커다란 선물 가운데 하나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인 ‘이성’이다. 하느님을 궁금해하는 것도, 답을 찾고자 하는 것도 이성이 발휘된 결과와도 같다. 이성의 도움으로 우리는 “창조주이시고 주님이시며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을 그분의 업적을 통하여 확실하게 알 수”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7항).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하느님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부족하기 그지없다. 하느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가능성은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그분의 ‘숨’으로부터 얻었지만, ‘하느님을 확실하게 안다’, 혹은 ‘이분이 하느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을 가두는 일이 되어 버릴 것이다.
모세가 그것을 경험했다. 하느님을 알고 싶고 답을 찾고 싶어서, 그리고 그것을 자신과 함께하는 이들에게 알려 주어야 해서 하느님께 당신 존재에 관해 물었다. 그런 하느님께서 답해 주신 당신 이름은 알쏭달쏭했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이 심오한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모세는 답답한 마음에 그렇다면 당신의 얼굴을 보여 달라고 다시금 청했더니 돌아오는 말은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20)는 대답이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 마치 바닷물을 컵에 담고 그 컵에 바다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없듯이 하느님을 알 가능성을 지닌 인간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크신 그분을 알 수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코끼리의 코를 만지는 것은 코끼리를 만지는 것이지만 코끼리 전부를 만졌다 할 수 없듯이, 또 누군가는 그 코를 만지면서 코끼리가 아닌 다른 것을 만지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의 이성만으로 하느님을 증명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으며, 분석하여 답을 찾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에서, 그리고 신학에서는 늘 1과 2 사이에 셀 수 없이 무수한 수가 존재함 앞에서 무한의 존재를 떠올리며 경외심을 드러내며, 1 더하기 1은 ‘2일 수 있다’는 것과 같이 약속과 보증으로 받은 구원의 확실한 보증을 받았음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존재는 신비 자체이다. 하느님의 존재는 신비 자체이기 때문에 알 수 있지만 알 수 없다는 알쏭달쏭함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 밖에 계신 무한함에 감추어져 있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은 완전하시며 선하시다’라며 하느님을 긍정하여 말할 수 있는 것과 ‘하느님은 무엇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구분해 낼 기회를 얻었다. 신앙은 여기서 발휘되며 믿음을 이해하는 길은 여기서 시작된다. 특별히 우리는 이 길을 ‘부정신학의 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를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느님은 인간이 아니다’, 혹은 ‘하느님은 물질적이고 유한한 분이 아니다’ 등으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한에서 하느님을 표현하고자 함에 있어서 인간 사고의 틀에 하느님을 가두지 않고자 하느님의 신비에 경외심을 고백한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답답해하지 말자. 내 지식이 부족하고, 내 신앙이 부족해서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그렇게 알 수 없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인간은 늘 답답함 속에 코끼리 전체가 아니라 코끼리의 코만 만지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이성이 하느님을 완전히 깨달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하느님 체험은 하느님에 대한 앎의 지식만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없다. 일상의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괴로움도, 행복도 하느님께서 생생한 현장 속에서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함의 길’은 믿음을 가꿔 나가는 여정과도 같고, 내 삶에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자리를 되새기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것을 성찰이라고 하며, 또한 그것을 기도라고도 한다.
믿음을 이해하는 방법은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신비는 닿을 수 없는 하늘의 이상 세계에만 자리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실 가운데 함께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비록 우리는 그것을 두고 ‘무엇무엇이 하느님이 아니다’라며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다(사도 17,27). 하지만 하느님을 찾는 여정과 믿음을 이해하는 여정은 내 삶에 하느님을 초대하고, 내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또한 내 삶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던지는 질문에 딱 떨어지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고민하는 나와 함께하시는 신비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인 것이다.
이제 “그래서 답이 뭔데요?”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 답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