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신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가르칩니다.”
신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냐고 묻는 신자분들께 ‘교의신학’을 가르친다고 대답하면, 이내 “교리신학이요?”라는 반문이 찾아온다. 그만큼 ‘교의’라는 단어는 우리 신앙생활에 낯선 단어이다.
또한 ‘교의신학’에서 ‘교의’만큼이나 ‘신학’이라는 말도 낯설기 그지없다. 신학을 가르친다고 하고, 또 신학을 함께 고민해 보자고 초대하면 “믿으면 되지 공부까지 해야 해요?”라며 신학은 곧 공부라는 고리타분함에 정색하는 반응과, 신학은 신부님들이나 신학자들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다분하게 다가온다. 신학마저 그렇게 멀게 다가올진대 교의신학은 언감생심 신앙생활에서 그리 와닿지 않는 저편 세계의 이야기인 듯 반응한다.
교의신학의 한 분야를 전공하고 학위 논문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할 즈음. 한국에 돌아가 공부한 것을 나누어야 하는 사명을 성찰하던 중, 공부한 교의신학을 나누는 사명이 신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크게 다가왔다. 신학이 신학생들만의 것이라면 ‘내가 고민하고 공부한 하느님은 신학생들에게만 전해져야 한다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서였다. 학위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힘들고 답답할 때가 많았지만, 조금씩 그 재미를 알아가는 교의신학을 어떻게 신자들과 나눌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전하려고 하면 듣는 이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직은 외국이었지만 한국의 신자분에게 전화를 걸어 교의신학에 대한 이해를 물어봤다.
“신학이요?”
“교리요.”
“에이 신부님, 왜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요 부끄럽게. 잘 몰라요. 그래도 성당은 열심히 다녀요!”
그분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신자분은 나의 우문에 현답을 해 준 분이다. 교의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나아갈 방향, 전해야 할 사명에 대해 일깨워 줬으니 말이다.
신학은 ‘하느님의 이야기’다. 하느님[神]에 대해 배운다[學]는 말로 결합되어 있지만 그 본뜻은 신약 성경에 쓰인 언어이자 전통적 언어인 그리스어를 통한다면 보다 접근이 쉬워진다. 그리스어에서 신학을 가리키는 테올로기아Theologia는 테오스Theos와 로고스logos가 합쳐진 단어이다. 여기서 테오스는 당연히 하느님, 곧 신이다. 로고스는 ‘배움’, ‘학문’에 대한 의미보다 ‘이야기’, ‘말씀’, ‘담화’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가 꼭 학문일 필요는 없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당신의 말씀이 꼭 책상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니 신학의 출발점은 학문에서보다 하느님과 나누는 이야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것에 기초를 두고 신학이라는 학문은 형성되었다. 신학이라는 학문이 세워지고 나서 학문의 결과로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면, 글자를 배워야만 말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을 수 있다. 하지만 글자를 배우지 않고도 말을 할 수 있다. 신학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셨기 때문에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됨에 기인한 것이다.
신학은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이며, 그것을 토대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것이다. 하느님이 누구인지, 그분께서는 무엇을 하셨으며, 나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의미인지 묻고 깨닫는 과정이 신학의 길인 것이다. 한 번쯤 신앙생활의 회의를 마주했을지 모른다. 줄곧 열심히 성당에서 봉사하고 주일 미사에 빠지지 말자는 목표를 두고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불현듯 찾아온 신앙생활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 가슴을 답답하게 할 때가 있었을지 모른다.
교회 안에서 받은 상처, 의미 없이 성당을 오가는 발걸음, 성당보다 더 재밌는 것이 많은 세상. 나아가 우리의 존재를 흔들어 놓는 상황에 봉착하면 그 질문은 더욱 절박해지기 그지없다.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는 답답함에 열심히 신앙생활 해 봐야 소용없다는 마음이 솟구치고, 불현듯 찾아온 고통 앞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결국 얻어지는 것은 이것인가 하는 회의가 찾아온다.
깊은 신앙심 없이, 깊은 고민 없이 성당을 다녀가는 ‘발바닥 신자’처럼 보일지라도 마음을 두드리는 생각의 아무 감흥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나는 천주교인이요’라는 내게 새겨진 인호印號는 줄곧 내게서 지워지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자신이 던지는 하느님에 관한 물음이나, 고통 속에서 등장하는 고뇌와 탄원은 신학함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말을 걸어오셨음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신학은 교리서에 담겨있는 내용만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신학교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수업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신학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역사에 대한 진리를 찾는 여정을 의미한다. 하느님과 나누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인간보다 높은 자로서 하느님께서는 낮은 자 인간을 당신 대화에 초대하셨다. 그것을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啓] 보이심[示], 곧 계시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대화에 우리를 초대하셨다면 우리는 그 초대에 응답해야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분과 나누는 대화에 초대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인 것이다. 신학의 원천은 하느님의 자기 개방인 계시와 인간의 응답인 신앙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셨다는 계시에서 신학은 출발한다. 그것을 인간이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연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것이며, 초월적인 것이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그 응답을 우리는 매 주일 성당에 나가는 발걸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고자 “아멘” 하는 응답으로, 우리의 하루에서 조금 덜 미워하고, 조금 더 사랑하며,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는 역사를 통해서 이룬다.
돌아가 보면, 신학에 대해 물었던 나의 질문에 정색하며 당황해했던 그 신자분은 이미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며 살아가는 분이셨기에 신학을 모르는 분은 아니셨다. 신학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고민이며, 자신을 믿음으로 초대한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이자, 이를 다른 이들과 나누고, 나누어진 삶을 공감하는 역동적 작업이다. 결국 그것은 우리를 기도할 수 있게 해 주는 통로인 것이다.
‘의미하다’, ‘그렇게 보이다’, ‘결정되다’라는 뜻을 지닌 교의dogma가 신학 앞에 붙는다고 해서 그 의미는 크게 변화되지 않는다.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의 올바른 길을 ‘마련하고’,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교의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결정과 규정을 뜻하는 교의는 사도 시대로부터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올바로 믿으며 고백하고, 하느님과의 대화에 충실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교회의 고민이며 결정이었다. 그래서 교의는 법조문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사도신경,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과 같은 그리스도교 믿음의 고백에 위배되는 내용들을 단죄하는 수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교의는 옳고 그름을 판가름 짓는 칼날이기에 앞서 우리가 나누는 하느님과의 대화를 바르게 안내하는 우리 믿음의 “친절한 문지기”이다.
교의신학. 교의신학이 꽃피는 자리는 우리 신앙생활의 자리이며, 교의신학을 통해 하느님과의 대화는 밤을 지새우도록 깊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