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이른바 ‘셔틀’ 서비스로 학교 앞 하굣길 풍경이 변화되었지만, 예전에는 교문을 나오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조잘조잘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나누며 나왔다. 학원버스로 셔틀하는 풍경은 변했을지라도, 손에 쥔 핸드폰이 관심을 빼앗아 가긴 했어도,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입에서 터져 나오는 재잘대는 말들은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기도 하다.
예수님과 함께한 이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저마다 수군대는 이들이 있었다. 놀라움을 나누는 대화기도 했고, 의혹을 증폭시키는 수군거림이기도 했다. 그것을 예수님도 아셨다(요한 6,43). 예수님은 그들의 수군거림에도 함께하셨던 것이다. 그들의 뒷담화를 캐묻고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알기 위한 예수님의 동행법이었다.
예수님을 철석같이 믿었던 이들이 실망을 마주했다. 믿는 도끼에 찍힌 발등이 더 아파서 그랬을지, 그의 처절한 죽음을 바라보고서는 실망해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나선다.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의 길은 곧아 있었고, 발걸음은 가벼웠는데, 막상 돌아가려니 차이는 것은 돌뿐이요 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다시 돌아올 리 없을지 모른다고, 이제 그동안 지냈던 삶의 터전이 무의미하다고 믿었었다. 메시아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으로 도래하여 불의를 이기고 구원을 선포하리라 기대했던 메시아가 누명을 해명하지 못한 채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죽어 가는 광경을 멀리서 지켜봐야 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나무들은 자취를 감춘 것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위의 태양은 그리도 따갑게 그들을 짓누른다. 그들은 돌아가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나눈다. 그들이 믿고 따랐던 이에 대한 영웅적인 행보가 이리도 허망한 죽음으로 끝나 버렸다는 아쉬움과 어쩌면 자신들이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서로 내뱉는 한풀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이라 느낀다. 혼자 돌아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자신들이 가진 실망과 돌아가서 고향 사람들에게 해야 할 변명을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둘이 찾아보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그 길에 두 사람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어느 사이엔가 나타난 다른 한 사람이 슬며시 다가왔다. 같은 길로 가려는 사람이니, 같은 실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겠거니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사람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 며칠 동안 벌어졌던 커다란 사건을 어찌 혼자만 모를 수 있냐고 따져 물어도 그는 그 이야기를 알려 달라는 투로 의아해한다.
길 위의 대화는 한풀이에서 회상으로 전환된다. 그들은 그에게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차근차근 설명해 준다. 그런데 설명을 들은 그가 설명이 부실하다는 듯,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 넣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목적지에 다다랐을 즈음, 길에서 만난 사람의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었는지 그는 가던 길을 더 가겠다 한다. 날이 저물었는데 길이 위험할지도, 저녁을 거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은 그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그리고 나눈 저녁에서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자신들의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 길고도 실망스러웠던 길. 예수님께서는 그 길에 결코 그들 둘만을 남겨 두지 않으셨다. 당신의 죽음이 두려워 숨어 있었던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당신의 역사를 설명해 주시고, 급기야 빵을 쪼개어 그들의 마음을 여시고 당신을 알아보게 해 주셨다.
엠마오로 돌아가는 그 길은 암울한 실망, 세상일을 모르는 사람을 만난 답답함, 그런 그가 설명하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기대감, 혼자 떠나보낼 수 없어서 가는 길을 붙잡는 사랑이 함께 있었다.
교회는 자신을 일컬어 ‘순례자’라고 고백한다.
“순례하는 교회는 자신의 성사들 안에서 그리고 이 시대에 딸린 제도 안에서 지나갈 이 현세의 모습을 지니고, 아직까지 신음하고 진통을 겪으며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피조물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교회헌장〉, 48항)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목적지는 엠마오가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전환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실망의 길 위에 함께하셨던 예수님은 결코 실망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려야 했다. 저마다 걸어가는 다른 길 위에 그분께서 함께하실 것임을 그들은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지상을 순례한다. 교회를 이루는 하느님 백성인 우리 모두는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지상 순례자들이다. 지상 순례의 길에 우리는 현세의 모습을 지니고 신음하고 고통을 겪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가시밭길을 걸을 때도 있고, 돌밭을 걸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눈이 열려”(루카 24,31) 예수님을 알아보고 꽃길을 걸어갈 때도 있다. 그때, 가시밭길이나 돌밭에서 타올랐던 마음을 떠올리게 된다.
교회는 천상의 교회를 향해 순례한다. 엠마오를 떠나 다시 길을 나선 제자들은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했다. 그들에게는 이제 목적지가 마련되었다. 목적지를 향한 길은 실망의 길도 한풀이의 길도 아니었다. 구원을 향한 여정이었다. 지상의 교회는 천상의 교회를 향해 순례한다(〈교회헌장〉, 49항). 순례자인 우리 모두는 이 길을 이리저리 떠돌며 방황하는 방랑자일 수 없다. 우리는 정확한 목적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길, 예수 그리스도가 마련한 길을 걷는 구원을 향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신학이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였다면,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바로 교회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의 건물도, 하나의 사회적 단체도 아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자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모으고 있기 때문”(〈교회헌장〉, 13항)에 부름받아 모인 우리는 교회이고 하늘나라의 시민인 것이다. 순례의 길에서 나누는 대화는 수군거림일 수 없다. 하굣길, 집으로 돌아가는 설렘에 조잘대는 아이들의 대화보다 설레는 구원을 향한 여정에서 나누는 대화이며, 저마다 다른 길에서 같은 목적지를 향해 나서는 길 위에서 나누는 풍요로움인 것이다.
순례의 길 위에서 신학은 풍요로운 대화를 이루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