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은 여러 세대에 걸쳐 다양한 범주를 제안하며 구원을 이해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현대인에게 여전히 중요한 고전적 이미지를 아우르며 구원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글 | 앙헬 코르도비야 페레스Ángel Cordovilla Pérez (교황청립 코미야스 대학교)
구원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관통하는 실재입니다. 신학이 우리를 위한 구원적인 관계에 있다는 관점에서 구원은 특정한 측면이 아니라 신학 전체를 가리킵니다. 신학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 실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대한 이해, 성령과 교회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구원을 이해하려면 하느님, 그리스도-영, 인간이라는 세 주인공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들 없이 구원은 없습니다. 각자의 자리와 역할이 있지만 구원은 각자 자유를 가진 세 주인공이 등장할 때 이루어집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상호 관계와 참조를 통해서만 고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서 생각하는 구원의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입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구원의 신은 단순한 ‘신’이 아닙니다. 이는 하느님을 보다 심오하고 근본적인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느님은 그 자체로 관계, 친교, 생명이시며, 삼위일체의 하느님으로 인간과 함께 자유의 역사를 시작하실 뿐만 아니라 그 역사를 창건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역사는 하느님의 역사이며 하느님이 쓰신 역사 속에서 행해지는 계시와 구원의 장입니다. 이는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역사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으로, 이를 통해 하나의 구원 역사를 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이해하면 하느님이 더욱 근본적인 분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독일 사제이자 신학자인 카를 라너Karl Rahner의 말처럼 하느님이 창조하시는 분이라서가 아니라, 당신과는 다른 것을 하느님 외부에 마련하시는 분이라서가 아니라, 친교를 나누자고 당신과 다른 현실을 부르시며 미래의 자기소통을 위한 문법이자 수신자로 택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상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양립할 수 있는 하느님의 개념은 삼위일체론적일 수밖에 없다”(발타사르Balthasar)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품 안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생각할 때나, 창조와 계시의 영역에서 하느님과 세상의 관계를 생각할 때나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선”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하느님의 수신자인 인간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인간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열린 존재이자 구성적 관계의 존재로 이해됩니다.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요소는 역사성인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완성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창조된 본성(은총과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고자 역사 속에 들어와 고랑을 파시는 하느님을 인간이 되실 수 있는 분으로 묘사했다면, 인간은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신성한 생명에 동참하도록 창조되었기에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유일한 소명인 존재입니다(《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22항 참조).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창조된 운명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벨기에 사제이자 신학자인 아돌프 게셰Adolphe Gesché가 구 소련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Andrei Tarkosky의 말을 인용하여 말했듯이, 구원은 우리가 인간을 어떤 이미지로 바라보는지에 달렸습니다. 게셰는 누구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의미에서 차고 넘치기를 열망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합당한 유일한 구원은 현실에서 인간이 하찮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미지와 이해는 인간의 소명과 존엄성과 발맞춰야 합니다.
세 번째 주인공은 인간이 되어 구원의 사명을 지니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온전하고 참된 하느님이자 사람이십니다. 그리스도가 구원이자 구세주인 이유는 몸소 하느님과 사람을 일치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누구이신가 만큼이나 어떤 일을 하시는지 보면 그리스도는 구세주입니다. 그분의 인격과 사명은 동일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존재(성자)를 떠나서는 그분의 사명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분의 사명(메시아-그리스도)을 떠나서는 그분의 궁극적인 정체성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개인적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재현하며 회상하게 하는 성령의 역할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중재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분은 창조된 현실을 갈고닦아 완성하면서 구원의 길을 실현하십니다.
이처럼 세 주인공은 구원의 사건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같은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느님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인간에서 하느님으로 이동하는 두 가지 움직임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는 이 둘 사이의 중개자로서 인간에게 몸소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으로 여겨지거나,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들임으로써 응답하는 인간의 대표자로 여겨집니다. 구원은 두 가지 움직임의 어느 방향으로나 생각할 수 있는데,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려면 두 움직임 모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첫 번째 천년이 전자를 강조했다면, 두 번째 천년은 후자를 강조했습니다. 천년 동안 상승적이고 인류학적 차원을 강조해 온 신학은 이제 하강적이고 신학적 차원을 강조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두 차원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강은 상승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이란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고 자발적으로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실제로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해야 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이 글은 스페인 학술지 <Razón y Fe>에서 발췌 및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원문 출처 ■
Cordovilla Pérez, Ángel. (2023). La concepción teológica de la salvación.
<Razón Y Fe> Vol. 287 Núm. 1461 (2023): Sanación y salvación pp.115-129
https://revistas.comillas.edu/index.php/razonyfe/article/view/19172
https://doi.org/10.14422/ryf.vol287.i1461.y2023.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