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이란 무엇을 의미하나요?

신학 칼럼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이란 무엇을 의미하나요?

<구원에 대한 신학적 개념> 2화

2024.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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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은 여러 세대에 걸쳐 다양한 범주를 제안하며 구원을 이해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현대인에게 여전히 중요한 고전적 이미지를 아우르며 구원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 앙헬 코르도비야 페레스Ángel Cordovilla Pérez (교황청립 코미야스 대학교)


 

구원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이끄시어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며 충만한 삶에 이르게 하시려고 역사 속 인간에게 오시며 시작된 과정입니다.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본 구원은 모든 의지를 다해 아드님과 영을 통해 성취하기를 바라시는 것으로, 미리 생각하신 계획이자 소망이며 독창적인 설계입니다(에페 1,3-14 참조). 하느님 안에서 태어나 하느님께 돌아가는 역사적 과정이 그리스도교의 구원 교리를 구성합니다. 여기에는 없어서는 안 될 세 명의 주인공(하느님, 인간, 그리스도)이 등장합니다. 이 관계는 인간이 하느님께 응답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두 가지 움직임(상승과 하강)으로 이루어지며, 주도권은 항상 하느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이 역사는 삼위일체에 맞춰 흐르며, 신학사에서 구원을 말하고자 사용했던 다양한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에페 1,4 참조) 피조물의 기원을 아드님의 형상으로 예정하신 것’(로마 8,29 참조)으로 재정의하고, 피조물의 미래를 영광 안에서(로마 8,30 참조) 그분에게 만물이 모이는 것(에페 1,10 참조)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제 이 과정을 구원론적 범주를 통해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a) 구원의 첫 순간은 창조입니다.

창조를 통해 구원이 주어져서가 아니라, 에페 1,3-14에서 말한 것처럼 구원을 하느님의 기본적인 창조 계획과 연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존재에게 생명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공간을 벗어나고자 하셨습니다. 리옹의 이레네우스가 한 말처럼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만들 누군가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유익과 사랑을 인간에게 담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분명한 점은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자세히 말해 그리스도이신 참된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본질적으로 자녀가 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구원과 관련이 있으며, 역사란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에서 온전히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나아가도록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교육 과정입니다. 안내자이자 교사는 외적인 모범이자 내적인 스승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교부들은 성경을 완전체로 보면 하느님께서 실현하시는 구원 계획을 시간의 흐름 속에 증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서서히 성숙해지게 하시며 몸소 창조하신 운명과 소명으로 이끄십니다. 아기와 어린이들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에페 4,13) 자라도록 양육하고 교육하십니다.

 

b) 두 번째 순간은 강생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창조와 관련된 참으로 새로운 순간이지만, 창조와 유사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전하고자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하느님의 생명이 직접 나타났을 때 인간이 이를 가장 개인적인 실재로 인식하고 자신의 창조를 운명으로 여기게 하시려고 강생을 통하신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강생은 그 자체로 이미 구원적인데 인간의 신성화가 이루어졌고(요한 1,1-14 참조), 하느님의 의로움이 자비와 신실함으로 드러났으며(루카 1,46-55;1,68-79 참조), 높은 곳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탄생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사는 사람들을 비추었기 때문입니다(루카 2,29-32 참조). 교부신학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있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라는 구원론의 고전적 표현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구원받고 해방되는 위치가 아니라 구원의 궁극적 목적지인 신성한 생명과 친교를 이루고 하느님의 존재에 참여하는 위치에 있음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야훼의 가난한 사람을 대표하는 나자렛의 보잘것없는 갓난아이로 강생하셨으므로 하느님의 자비와 신실함은 의로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해방, 연대 같은 현대적 범주가 생겨났고, 예수님의 역사적 삶과 왕국 선포의 구원적 차원이 강조되었습니다.

 

c) 강생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활에 비추어 볼 때 구원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구원은 죄인, 저주, 형벌을 대신하여 인간이 하느님의 축복과 의로움에 다가가게 하는 기묘한 교환(*성탄의 신비와 관련된 용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 526)으로 여겨집니다(갈라 3,13-15, 2코린 5,21 참조). 이는 종과 노예가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루어졌으며(1베드 2,21-25 참조)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갈라 4,4-6 참조)가 되고 그리스도의 친구(요한 15,15 참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를 대신하여 이 행동을 실현하신 것입니다(로마 3,21-25 참조).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고 계약을 다시 세우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대신하셨다기보다 우리를 그분 안에 스스럼없이 포함시켜 그분의 행동을 우리의 행동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 역시 교부신학에 뿌리를 둔 생각으로 중세 신학의 중심이었으며 현대 신학에서 크게 발전했습니다.

 

d)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활을 통해 조명되고 변화되기에 구원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에게 순종하고 형제들과 끝까지 연대하셨던 그리스도에게 응답하시어, 성령의 힘(로마 1,1-3 참조)으로 그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리시고 결정적인 생명(사도 13,33 참조)을 불러오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속은 부활의 승리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악의 세력을 뿌리부터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인간을 포로로 잡은 자를 오히려 포로로 잡으시고 오랫동안 구원을 기다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깊은 곳으로 내려가셨으며(ad inferos 저승에 가시어), 잊히고 버림받았다고 느낀 모든 이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분은 역사 속에서 들려오는 피조물의 신음과 해방을 향한 외침을 담아 우리 안에 구원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영을 보내셨습니다(로마 8,18-28 참조). 부활하신 주님의 영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둘로 갈라진 인류가 하나 되어 화해하는 백성이 되게 합니다(에페 2,13-19 참조).

 

e) 주님의 부활은 종말론적 완성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종말론적 시대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새로움을 누리고 살 수 있으며 그분 안에 만물이 모이기를 고대하며 우리의 삶과 행동으로 이를 앞당길 수 있습니다(에페 1,1-23 참조). 이렇게 하느님께서 예견하신 만물의 회복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만물의 왕이자 주님이시며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께서 어좌에 오르시면(묵시 4,11; 5,9.9.10.12; 11,17-18; 12,10b-12a; 15,3-4; 19,1-7 참조) 구원은 분명한 친교의 형태를 보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이 창조된 이유인 단 하나의 운명에 도달하고,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코린 15,28).

 

 


 

*이 글은 스페인 학술지 <Razón y Fe>에서 발췌 및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원문 출처 ■

Cordovilla Pérez, Ángel. (2023). La concepción teológica de la salvación.

<Razón Y Fe> Vol. 287 Núm. 1461 (2023): Sanación y salvación pp.115-129

https://revistas.comillas.edu/index.php/razonyfe/article/view/19172

https://doi.org/10.14422/ryf.vol287.i1461.y202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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