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인류학적 정박지

신학 칼럼

구원의 인류학적 정박지

<구원에 대한 신학적 개념> 1화

2024.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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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은 여러 세대에 걸쳐 다양한 범주를 제안하며 구원을 이해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현대인에게 여전히 중요한 고전적 이미지를 아우르며 구원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글 | 앙헬 코르도비야 페레스Ángel Cordovilla Pérez (교황청립 코미야스 대학교)


 

구원을 신학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완성된 방식이 아니라 첫발을 내딛는 성사적 방식을 통해 어떤 방법으로든 구원받은 경험에 참여한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것은 다른 이론적 질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정적 상황에서 해방시키시며 신성한 소명으로 부르시고 충만함으로 이끄시는 힘을 가지신 그리스도와의 구원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신학적 성찰에는 개인적 개입이라는 불가피한 요소가 들어가지만 구원에 대한 질문은 인간 삶의 근본 문제에 더욱 영향을 줍니다. 구원론 또는 구원의 신학적 개념은 하느님, 그리스도, 인간(피조물)에 관한 신앙의 진리의 실존적이고 구원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지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구원을 건강, 웰빙, 행복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학은 이 출발점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 관점은 성경이 발전되던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늘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보게 될 인간, 하느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려면 용어와 현실을 전면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살루스salus라는 단어는 온전함, 충만함, 완성된 삶을 의미하므로, 이 단어를 이해하려면 부정적인 상황을 극복(구속, 해방, 치유)하고, 인간의 근본적인 갈망과 소망(정의, 지혜, 아름다움, 진리, )을 성취하고, 주위 환경과 더불어 충만히 살아가는 삶(신성화, 변모, 그리스도 안에 한데 모임)을 아울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구원의 선포와 신학적 이해에는 인류학적 배경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인간을 위한 구원 선포는 욕구와 소망과 은총의 존재인 인간 본성의 역동성과 접목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존재 의미와 삶의 운명을 궁금해하는 수수께끼 같은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의미와 운명이라는 두 질문은 구원에 관한 담론과 교리의 출발점입니다. 인간은 유한하고 우연적이며,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입니다. 물질적 현실에서는 물론이며 정신적,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우연성, 유한성, 죄책감을 경험하면서 구원받기를 바라고, 소망과 충만함을 충족한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동시에 주어질 수 없습니다. 현실에서 충만함을 얻기를 바라지만 충만함이란 선물이나 은총처럼 주어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충만함은 창조된 현실의 역동성만으로 완전히 충족될 수 없기 때입니다.

 

유한하고 우연적인 인간의 본성은 가장 먼저 인간을 욕구의 차원으로 끌어들입니다. 인간의 유한성은 인간을 떨쳐내기 힘든 욕구와 나약함 속에 놓이게 만듭니다. 인간의 본성은 갈급한 욕구를 충족해야 하는 노예의 삶을 벗어나 더 나은 현실을 향하려는 결심을 방해합니다. 결국 인간의 역사는 본성을 극복하고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투쟁의 과정입니다. 종교와 신앙은 흔히 이러한 욕구에 응답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관련이 있었으며, 구원 역시 불안정하고 부정적인 상황을 극복하여 안정적이고 안전한 곳을 향하는 길로 여겨져 왔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이 최우선 욕구라면 구원은 배를 채우는 빵과 갈증을 해소하는 물로 여겨질 것입니다. 외부나 내부의 세력 때문에 노예 상태에 놓여있다면 구원은 해방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전염병이나 팬데믹 상황이라면 구원은 건강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과 욕구의 관계는 외적 또는 육체적인 관점과 내적 또는 영적인 관점으로 볼 수 있으며, 근본적 현실에 따라 더욱더 육체적이거나 영적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구원은 병든 자에게는 건강으로, 눈먼 자에게는 빛으로, 굶주린 자에게는 빵으로, 길 잃은 자에게는 목자로, 가난한 자에게는 재물로, 죽은 자에게는 생명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은 욕구의 존재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소망의 존재입니다. 더 나은 현실을 향해 나아가며 자신이 소망하는 쪽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지만 여기에 전념할 수도, 소망을 충족할 수도 없습니다. 가장 인간적인 모든 것은 타자성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타인과 나의 거리와 차이는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줍니다. 벨기에 사제이자 신학자인 아돌프 게셰Adolphe Gesché가 말했듯이 이 차이는 사랑의 영역과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초월성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근본 법칙입니다. 이를 존중하지 않고 이미 충족된 욕구와 지금으로서는 보류된 소망을 혼동한다면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인격적 만남의 신비를 무효화하거나 하느님의 실재를 우상으로 왜곡하게 됩니다. 바로 이 소망의 차원에 그리스도교 구원의 두 번째 정박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구원은 우리가 반드시 충족해야 할 욕구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충만함을 느끼게 하는 인격적 차원(사랑, 자유, 양심)에 대해서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은 이러한 의미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친구, 배우자, 연인으로 일컬어 왔습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세 번째 요소는 정의롭고 선하고 진실하며 아름답고 거룩한 현실에 대한 갈망입니다. 인간은 은총의 존재이지만 이 갈망은 이런 우리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유한하고 우연적이며 모호한 우리 삶과 역사에서 이 갈망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정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확고한 정의를 갈망합니다. 인간이 바라는 정의는 진실을 밝혀 수많은 제도와 구조의 허울을 비판하며 역사의 희생자들을 옹호하고 선이 악을 이기며 불의하고 죄 많은 현실을 거룩한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정의입니다. 신성한 선물은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줌으로써 상황을 바로잡고 악한 자를 선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인간을 초월하는 것으로 인간이 갈망하는 현실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면에서 구원의 신학적이고 무상적인 점이 뚜렷하게 강조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성을 뛰어넘는 신성화의 구원 사업을 우리 안에서 실현하시는 하느님으로 여겨집니다.

 

 


이 글은 스페인 학술지 <Razón y Fe>에서 발췌 및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원문 출처 ■

Cordovilla Pérez, Ángel. (2023). La concepción teológica de la salvación.

<Razón Y Fe> Vol. 287 Núm. 1461 (2023): Sanación y salvación pp.115-129

https://revistas.comillas.edu/index.php/razonyfe/article/view/19172

https://doi.org/10.14422/ryf.vol287.i1461.y202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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