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은 2025년 정기 희년 표어를 “희망의 순례자(Pilgrims of Hope)”라고 공식 선포하였습니다. 특별히 교황은 칙서를 통해 ‘희망’의 가치뿐만 아니라 ‘순례’에 대한 의미도 강조합니다.
“모든 희년 행사의 근본 요소는 순례입니다. 전통적으로, 순례 여정을 나서는 것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 우리는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가고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건너가서 피조물과 예술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서로 다른 체험과 문화의 풍성함을 보물로 여기는 법을 배웁니다.”(〈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5항)
희년 동안 우리는 순례를 통해 많은 은총과 풍성함을 체험하겠지만, 단순히 몸을 움직여 거룩한 장소에 다녀오는 순례에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황이 강조한 순례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요?
순례하는 교회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부터 강조된 “순례하는 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 시절부터 꿈꿔 온 선교를 중심에 둔 교회, 즉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에서 위로와 빛을 받지 못하고 힘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복음의 기쁨〉 49항)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번역한 한국어판 〈복음의 기쁨〉 제1장 1절에서는 ‘출발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어 원문에서는 ‘Una Chiesa in uscita’, 영문에서는 ‘A Church which goes forth’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실 ‘출발하는 교회’보다는 ‘밖으로 나서는 교회’, ‘밖으로 향하는 교회’라는 표현이 적합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다른 장소로 이동하거나 새로운 땅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인과 교회가 모두 자기중심이 아닌 그 주변(변방)으로 나아가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어 주라는 교황의 초대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1티모 1,1)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러 ‘떠나는’ 이들, 동시에 자신만이 아닌 주변 이웃들에게도 그 뜻깊은 만남의 체험을 전하러 ‘떠나는’ 이들이 “희망의 순례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흐름은 성경 전체를 관통합니다. 아브라함은 새로운 땅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아들입니다(창세 12,1-3 참조). 모세는 백성을 이끌고 약속된 땅으로 떠나라는 부르심을 듣습니다(탈출 3,17 참조). 예레미야는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한다.”(예레 1,7 참조)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신약에서도 제자 일흔두 명은 “가거라.” 하신 예수님의 명에 험난한 선교 여정을 떠납니다(루카 10,3 참조). 걱정 반 기대 반이었던 제자들은 그 여정을 마친 뒤 복음의 큰 기쁨을 느끼고 돌아옵니다(루카 10,17 참조). 그리고 오순절에 다락방에서 숨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께서 내려오신 순간부터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때 많은 이가 제자들의 설교를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사도 2,6) 듣고 개종합니다. 만약 제자들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면, 다락방에 그대로 숨어 있었다면, 교회는 그저 하나의 민족, 혹은 도시, 다락방의 교회로만 남았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항상 ‘나가시는’ 하느님의 존재와 삶의 방식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역사에 개입하심으로써 우리를 향해 ‘나아가시는’ 방식을 택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무(無)로부터 실재를 창조하시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셨습니다. 단순히 창조만 하시지 않으시고, 역사 안에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는 인류에게 완전히 ‘자신을 내어 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으로부터 ‘나가’ 육화하심으로써 진정한 인간의 모습(필리 2,6-8 참조)을 취하시고, 성자는 십자가에서 수난을 받으시고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함으로써 또다시 자신으로부터 나가십니다.
파라클리토 성령은 모든 이에게 마음을 열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빛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식하도록 이끄십니다(〈복음의 기쁨〉 154항 참조). 그래서 성령께서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밖으로 나가게” 하십니다(사도 1,12-14 참조).
하느님을 찾아 떠나는 여정
'희년 전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황은 전대사를 얻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지 순례는 기존에 있던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이 계신 곳을 향해 방향을 돌리고, 하느님을 찾아 ‘떠나는 여정’입니다.
성지를 방문할 때는 단지 새로운 장소를 관광하기 위함이 아니라 거룩한 장소의 전례에 동참하거나 그곳에 머물며 성체 조배를 해야 합니다. 즉 하느님 곁에 머물며 그분께 희망을 걸고 자비를 간청함으로써 우리는 영적 쇄신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교황은 전대사를 얻기 위한 또 다른 방법으로 자비의 활동을 강조합니다. 이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비의 육체적 활동은 병든 이, 수감자, 고독한 노인, 장애인 등 육체적인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찾아가고, 그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 ‘순례’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자비의 영적 활동은 세상의 논리가 아닌 하느님의 논리, 자비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삶입니다. 영적으로 불안하고 고통을 겪는 이들 안에도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찾아 ‘떠나는’ 일입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희망의 순례자들
일상에서 이러한 희망의 순례자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36.5도》라는 책에서는 대한민국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사람답게,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것뿐인데 이마저도 무척이나 힘든 세상이 되었다. ……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나서, 평범한 교육을 받고, 평범한 대학을 나와도, 큰 어려움 없이 취업하고, 훗날 아기자기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삶이 바로 우리의 정상 체온인 ‘36.5도의 삶’인데 대한민국 땅에서는 이마저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권윤택, 권현택, 《삶의 36.5도》, 좋은 땅, 2017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고 우울한 하루의 연속이지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책의 작가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 속에 등장하는 소위 ‘작은 영웅들’ 때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크게 바꾸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지만 자기 삶의 자리에서 선한 행동으로 이웃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에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며,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도맡아 합니다. 비록 그들의 행동이 대단해 보이지는 않을 수 있지만, 많은 이에게 행복감을 안겨 주는 이들입니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사회의 작은 불씨가 되어 주는 사람들까지 모두 하느님의 일을 하는 희망의 순례자들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