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 안식년을 맞아 잠시 유학 시절을 회상하며 로마에 머물렀습니다. 과거 몸담았던 한국 기숙사에서 너무나 반갑게 맞아 주셨고, 여전히 옛스러운 로마의 거리는 변함없이 저를 반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분주하게 건축물을 새로 세우고, 도로와 시설들을 정비하는 곳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바티칸 기차역과 바티칸 광장이었습니다. 2000년 대희년 이후로 찾아오는 정기 희년을 준비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던 것입니다. 2024년 5월 9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 앞에서 교황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Spes Non Confundit)〉를 통해 25년마다 찾아오는 정기 희년을 선포했습니다.
희년의 시작
희년의 유래는 레위기에서 출발합니다. 바빌론 유배 이전에, 유다인들은 모세의 법에 따라 7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년을 7번 지낸 49년의 다음 해를 축제로 지냈습니다. 희년은 50년마다 한 번씩 숫양의 뿔 모양을 한 ‘요벨’(히브리어 יובל, yobel, 희년의 라틴어 ‘유빌레움jubilaeum’의 어원)이라는 나팔을 불며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는 해였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며, 하느님 백성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속한 존재로, 세상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정신을 상기하기 위해 희년마다 노예와 죄인을 해방하고, 하느님께 상속받은 땅과 집, 세상의 모든 것을 다시 옛 주인에게 반환하며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1300년을 희년으로 선포했고, 이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희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100년을 주기로 희년을 지냈으나, 1470년부터 25년 주기로 ‘정기 희년’이 이뤄졌습니다. 희년에는 대사 조건을 충족한 신자에게 전대사, 즉 저지른 죄에 대한 잠벌을 사면받는 은총이 수여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희년이 있습니다. 유학 시절 경험한 특별 희년,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2주년인 2015년 3월 13일에 선포된 ‘자비의 희년’입니다. 교황은 기존 희년의 정신에 자신의 핵심 가치인 ‘자비’를 한 스푼 더했습니다. 그것도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보다 실천적이고 사목적인 방법으로 말입니다.
많은 순례자가 하느님의 자비를 직접 체험하도록 자비의 성문을 로마와 각 지역 교회의 주요 성당과 순례지에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교황께서 친히 바티칸 광장에 나오시어 상설 고해소에서 고해성사를 주시던 것처럼 세계 각 교구에서도 고해성사의 물결이 이어졌고, 한국 교회 역시 많은 상설 고해소가 설치되어 고정된 시간에 고해성사가 이루어지도록 각 교구 성사 담당 신부가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
10여 년이 지난 지금, 교황은 끊임없이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알고 깨닫도록 이끕니다. 교황은 칙서를 통해, 희망이 무엇보다 하느님 은총과 그분의 충만한 자비의 원천에서 출발하고, 그 은총과 자비를 입은 우리가 온갖 어려움을 겪는 형제자매들을 위한 희망의 구체적인 징표, 즉 희망의 순례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7항 참조).
그래서 하느님 자비의 무한함을 발견하는 방법으로 대사의 은총을 강조하며, 구체적으로 ‘대사 수여’를 관할하는 교황청 내사원에서는 기존 대사 수여 방법*과 더불어 그리스도인 모두가 희망의 순례자가 되도록 연옥 영혼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대리 기도의 형태를 다양하게 추가했습니다(교황청 내사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선포하신 2025년 정기 희년 동안 대사를 수여하는 규정들〉 참조).
* 전대사를 얻기 위한 통상적인 조건[영적 준비(진정한 회개), 성사적 준비(고해성사와 영성체), 교황의 지향에 따른 기도]과 자선 행위와 성지순례로 이어져야 함.
① 희년을 위한 거룩한 장소를 순례하고 전례에 참여
로마의 4대 교황 대성전들(성 베드로, 라테란, 성모, 성 바오로), 예루살렘 성지의 대성전들(예루살렘 성묘, 베들레헴 예수 탄생, 나자렛 탄생 예고), 그 밖에 주교좌 성당 또는 지정된 성당이나 거룩한 장소를 순례하고 미사를 참여하면 전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의 전례, 시간 전례인 성무일도, 공동으로 바치는 십자가의 길과 묵주 기도, 찬미가(Akathistos: 비잔틴 전례를 거행하는 동방 교회의 마리아 노래), 참회자들의 개별 고백으로 마치는 참회 거행에 참여하면 됩니다.
② 희년을 위한 거룩한 장소를 방문할 수 있지만, 전례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
경건한 마음으로 적절한 시간 동안 성체 조배와 묵상을 하고, 주님의 기도와 신앙 고백(신경)으로 마치며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청합니다.
③ 중대한 이유로 위 두 가지 방법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
봉쇄 수녀승과 수도승, 노인, 병자, 수감자, 병원이나 돌봄 시설에서 일하면서 병자에게 지속적인 봉사를 제공하는 이들은 자기 집에서 또는 자신들을 매어두는 어느 곳에서든 주님의 기도와 신앙 고백, 그리고 희년에 부합하는 그 밖의 기도를 바치고, 자기 삶의 고통이나 고난을 봉헌한다면, 똑같은 대사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④ 하루에 두 차례의 전대사
원칙적으로 전대사는 하루에 한 번만 얻을 수 있지만(〈대사 편람〉, 제18조 제1항 참조), 연옥 영혼을 위하여 애덕 행위를 한 신자들이 이미 성체를 영한 그날 두 번째 미사에서 성체를 영한다면 같은 날 두 차례의 전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두 번째 전대사는 죽은 이들에게만 적용됩니다.
⑤ 자비의 육체적 활동
도움이 필요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형제자매들(병든 이, 수감자, 고독한 노인, 장애인 등)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 순례한다는 의미로 그들을 찾아가 적절한 시간 동안 방문한다면, 대사를 얻기 위한 통상적인 조건을 따르면서 희년 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년 내내 반복해서 그들을 방문할 때마다 전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⑥ 자비의 영적 활동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고 대사를 얻기 위한 통상적인 조건을 따르면 희년 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⑦ 참회의 정신을 구체적이고 너그러운 방식으로 실천
금요일의 참회적 성격을 재발견해,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참회의 정신으로 무익한 오락과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 응당한 액수의 돈을 기부함으로써 전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⑧ 생명을 수호하고 보호하기 위한 종교·사회 사업을 지지
생명을 수호하고 보호하기 위한 사업, 그리고 가난하고 고통받은 이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사업(버려진 아이, 어려움을 겪는 젊은이, 궁핍하거나 고독한 노인, 이주민의 삶의 질 자체를 위한 사업)에 후원하거나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전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⑨ 공동체 자원봉사 활동과 개인의 헌신
공동체에 대한 자원봉사 활동이나 그 밖의 개인적인 헌신에 적절한 여가를 할애함으로써도 얻을 수 있습니다.
⑩ 교황 강복
교구장 주교는 주교좌 성당이나 희년 관련 개별 주요 성당에서 전대사가 결부된 교황 강복을 줄 수 있습니다. 이 교황 강복을 받는 신자들은 통상적인 조건 아래 전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⑪ 선교수도회 프로그램 참여
선교수도회(예를 들어 바오로회, 카푸치노회, 예수회, 빈첸시오회)에서 주도하는 선교 프로그램, 영신 수련,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톨릭 교회 교리서〉 관련 교육 활동에 교황의 정신에 따라 신실한 마음으로 참여한다면 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