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훗날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우리는 분명 진화한 세상에 살고 있다. 과학 기술과 문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폭발적으로 진보하고 있으며 전자 기기는 서로를 연결해 한시도 외롭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쉼 없이 쏟아지는 뉴스들, 손가락만 움직이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이 도처에 있는 우리는 예전 세대가 꿈꿀 수 없었던 시대에 살고 있다. 핸드폰을 통해 음식을 시키고 필요한 물건을 사고 은행 업무를 본다.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유행을 좇아 활발하게 사회 활동에 참여한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풍요의 시대, 진보의 시대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냥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끊임없이 외로운 사람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들, 쉽게 접하게 되는 혐오 발언, 더 이상 서로를 지켜주지 않는 사람들, 환경 문제로 인한 자연재해, 타인과의 비교, 신기술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범죄들. 이러한 현상 안에서 누군가는 고통을 호소하고, 우리는 점점 더 외롭기만 하다. 늘어가는 마약, 혐오 범죄, 환경 파괴, 출산율 감소, 우울증과 공황, 자살률의 증가가 이를 증언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세계로 넓히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정처 없이 떠도는 난민들과 여전히 주린 배를 안고 사는 사람들, 진리가 사라진 상대주의 안에서 점점 더 견고해지는 민족주의, 부익부 빈익빈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기술 문명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자문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세대와 비교할 수 없는, 슬프고 괴로운 시대에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이토록 외로워 본 적이 없고,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없다.
그러던 때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나타났다. 마치, 이집트의 압제에서 신음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보내졌듯, 질병과 죄로 고통받던 연약한 이들 사이에 예수님이 나타났듯, 그가 나타났다. 그는 광야에서 예언자가 외치듯 세상에 말했다.
“연민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입니다. 진정한 연민은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2016년 자비의 희년 연설)
“오늘날의 경제는 사람을 배제시키고, 폐기물처럼 여깁니다. 우리는 ‘폐기물의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무관심은 우리 시대의 질병입니다. 지구의 비명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찬미받으소서’)
“기술은 진보를 위한 도구이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2019년 바티칸 과학원 연설)
그의 모든 말에는 울림이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미처 잊고 있던 것들을 일깨우는 그의 말은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닫게 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했고 상처를 입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적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상기했다.
그의 말에 더욱 힘을 실어 준 것은 거창한 신학 이론이 아니었다. 그저 그는 실천했다. 취임 후 로마 외 첫 지역 방문을 시칠리아 람페두사의 난민촌으로 결정했고 무릎을 꿇은 채 죄인들의 발을 씻겨 주었다. 병자들을 껴안았고 어린아이들이 제대 위에 올라 뛰어노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아시아의 동쪽 끝까지 찾아가서는, 침몰한 배의 희생자 가족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위로를 보냈다. 그를 통해 많은 이들이 사랑의 가치를 직접 경험했다.
그를 직접 만났던 순간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다. 기회는 생각보다 많았다. 제의실에 느닷없이 등장해 인사를 보내왔으며, 미사 후 봉고차의 맨 뒤편에 앉아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항상 밝은 미소와 기분 좋은 에너지를 나는 온전히 체험할 수 있었다.
학교의 기념일을 맞이해, 그와 한두 마디를 직접 나눌 기회가 있었다. 악수하는 아주 짧은 찰나,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는 나에게 누군가는, 그가 “나의 어머니가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나 하는 말을 전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고민 끝에 그에게 말했다.
“우리 한국인들이, 당신의 애정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동쪽 작은 나라에 방문했던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듯, 그는 다른 손을 내밀어 우리가 서로 맞잡고 있던 손을 감싸안았다.
얼마 전, 그는 세상을 떠났다. 당분간 외부 활동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 날까지 사람들을 만났으며 전쟁과 폭력,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노인들과 아이들, 여성들을 기억하며 호소했다. 그리고 충분히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부활절 다음 날, 하느님께로 홀연히 돌아갔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훗날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그와 함께한 시대를 어떻게 기억할까? 진보된 과학 기술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그러나 외로움과 고통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외로움을 덜어 주고자, 괴로운 이들의 신음을 줄여 주고자 그는 노력했다. 뛰어난 통찰력과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세상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무수한 가르침은 기록으로 남아 우리를 끊임없이 일깨울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를 이어받아 세상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지금도 여전히 종종 잊어버리곤 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리라. 그 안에서 인류는 서로에게 눈을 돌릴 것이며 전쟁과 폭력, 이기심과 무관심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게 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간을 훗날 사람들은,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한 시대라 부를 것이다. 이 시대는 조금은 외롭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하느님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 시간 안에 당신과 나, 우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