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못마땅했던 고향 나자렛 사람들
마르코 복음 6장 1절부터 6절까지의 이야기는 고향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며, 성경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그분을 향한 당대의 ‘몰이해’ 사이의 충돌을 비춥니다. 나자렛은 예수님이 유년기를 보낸 고향 마을입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가까이에서 마주한 이웃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유년기의 예수가 보인 평범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예수님을 성경이 증언하는 ‘인물’로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마르코 복음이 묘사한 이 사건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놀랄 정도로 훌륭했다는 데에서 발생합니다. 의외의 훌륭함과 성공이 오히려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함으로 이어지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로 번집니다. 여기서 ‘못마땅하게 여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인 ‘스칸달리죠(σκανδαλίζω)’는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스캔들’이라는 말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게 된 못마땅함의 이유는 예수님이 ‘목수’ 출신이라는 것, 또 ‘미혼모’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것, 그런데도 ‘경탄을 자아낼 만큼 훌륭한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복음서는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가 빚은 편견의 결과를 ‘걸려 넘어짐’으로 규정하며, 예수님의 삶을 향한 시선마저도 인간적 선입견과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알려 줍니다.
편견에 ‘걸려 넘어지는’ 이들의 이야기
2010년에 개봉한 영화 〈터커 & 데일 Vs. 이블〉을 원작으로 삼은 〈핸섬가이즈〉는 ‘못마땅함’으로부터 파생된 편견에 ‘걸려 넘어지는’ 이들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영화는 재필(이성민 扮)과 상구(이희준 扮)가 오래전부터 꿈꿔 온 전원생활을 하기 위해 외진 산골 마을로 떠나는 여정에서 시작합니다.
재필과 상구는 천성이 착하고 순했지만, 누구라도 움찔하게 만드는 험악한 인상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웃지 못할 헤프닝도 벌어집니다. 극 중에 로드킬을 당한 염소를 불쌍히 여긴 재필과 상구가 죽은 염소를 포대에 담아 트럭에 싣고 묻어 줄 곳을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곁을 지나던 경찰관 최 소장(박지환 扮)과 남 순경(이규형 扮)은 이들의 수상한 외모만 보고 강력범죄로 오해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문제는 재필과 상구가 자신들을 향한 주변의 편견 어린 시선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재필과 상구는 자신들과 동선이 겹치는 여행객 무리와 충돌을 하게 됩니다. 미국 진출을 앞둔 프로골퍼 성빈(장동주 扮)을 비롯한 부유층에 속한 젊은이들(어쩌면 두 주인공과 대척에 선 인물들이 ‘부유층’이라는 점도 선입견과 편견으로 말미암은 영화적 구성처럼 다가올 수도 있지만)로 구성된 이 무리는, 처음부터 겉모습만 보고 재필과 상구를 연쇄살인마로 규정지으며 두 사람을 향한 심리적 단죄를 벌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재필과 상구가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거쳐서 자신들이 꿈꿔 온 시골집을 마련해 낸 것마저도 다른 이들로부터 존중받지 못합니다.
그러다 성빈 무리에 속해 있던 미나(공승연 扮)가 우연히 펼쳐진 사건을 계기로 재필과 상구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두 사람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면서 되려 상황이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미나의 모습을 두고 오히려 그의 일행들은 재필과 상구를 향한 편견을 극대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 재필과 상구가 얻은 시골집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악령 ‘바포메트’에 씐 장소라는 설정이 더해지면서 이야기의 호흡이 가빠집니다. 이 지점에서부터 영화는 슬래셔 무비의 형식과 오컬트적 요소를 적절히 버무리고 코믹적인 흐름을 유지해 감으로써 영화가 품은 주제를 더욱 도드라지게 합니다.
‘오만’과 ‘편견’에 무너지는 ‘선의’와 ‘진실’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유명한 문구입니다.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들의 ‘오만’과 ‘편견’이 품은 주관성과 그 주관성으로부터 증폭되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시선 때문에 무너지는 선의와 진실은 언제나 우리 삶 안에서 반복되는 부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조리는 부당하게 새겨진 못마땅함의 시선, 즉 오만으로부터 빚어진 편견 어린 시선에 걸려 넘어지는 세태의 반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화 〈핸섬가이즈〉가 혼합 장르물로서의 색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지점이, 편견으로 인해 반복되는 우리네 일상 속 부조리를 상징하듯 다가옵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을 웃음 짓게 만들지만, 그 웃음 뒤에 감추어진 부조리를 잊지 않도록 끔찍한 현실을 적절히 각인시킵니다.
교회 공동체 안의 편견 어린 시선
우리 시대 안에서 ‘못마땅함’으로부터 파생된 편견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세태를 떠올려 봅니다. 신학생 때 봉사활동을 했던 요셉의원에서 마주한 노숙인 환우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노숙인 환우분들이 요셉의원에서 만난 의사 선생님들과 신부님, 수녀님, 봉사자들 덕분에 성당을 찾아갈 마음이 생겨 자신들이 머무는 곳으로부터 가까운 곳의 성당을 찾아갔는데, 노숙인 차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성당 입구에서 저지당했다고 했습니다.
또 한 달에 한 번 성소수자들을 위한 미사에서 만난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신앙인으로서 당당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나서고 싶지만, 그들을 향한 편견 어린 시선과 혐오 가득한 분위기 때문에, 성당에 나가기가 두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사성제 안에서 울고 보채는 아이나 장난을 치는 어린이들을 두고 제재를 가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의 기억도 떠오릅니다. 어린아이들이기에 당연히 보일 수 있는 모습을 두고 못마땅해하며 그들이 유아실로 내몰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어른들의 모습이,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에게는 울고 보채는 아기들이나 장난을 치고 떠드는 어린이들의 모습보다 훨씬 더 큰 분심으로 다가옵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큰 결심을 품거나 남들의 도움에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않고도 편안하게 성당에 나와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성당의 수가 현저히 적은 한국 교회의 현실도 함께 생각해 보게 됩니다. 특정한 성당에 방문해야만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의 현실도 함께 말입니다. 그밖에 본당의 청소년들이 공동체 안에서 상대적으로 소수라는 이유로 소성당이나 강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는 모습도 곱씹어 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에서조차도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하거나 못마땅한 상황을 차단하려다가 걸려 넘어지는 경우를 자주 마주합니다.
‘못마땅함’을 넘어서는 신앙인
예수님을 못마땅해하다가 스스로 걸려 넘어진 이들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에 심어진 ‘못마땅함’ 때문에, 이웃 안에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오시는 예수님을 오롯이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말미암은 ‘못마땅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