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1945년 10월 29일 파리에서 행한 샤르트르 본인의 공개 강연 내용을 담은 책입니다. 여기서 샤르트르는 실존주의를 설명하기 위한 네 가지 키워드를 제시합니다.
먼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명제를 제시합니다. 이 명제는 사물의 본질, 즉 본성이 존재 그 자체보다 더 근본적이고 불변적이라는 기존의 관점을 뒤집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을 위해 미리 작성된 청사진은 없으며 따라야 할 인간성도 미리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즉 인간은 선재된 본질에 대한 설정 없이 열려 있는 채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선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관성’이 제시됩니다. 샤르트르는 데카르트의 ‘cogito(생각하는 자아)’만을 유일하게 확실한 진리라고 표명했습니다. 순수하게 철학적으로 완전한 진리를 찾고자 희망한다면 자신의 주관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외에 나머지 것들은 모두 추정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이 부분에서 세 번째 키워드가 연결되는데, 바로 ‘책임’입니다. 흔히 실존주의에 가해지는 비판은 도덕 법칙을 무용하게 만든다는 데 있는데, 샤르트르는 오히려 인간이 주관성을 지닌 채로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진정한 의미의 책임이 가능해진다고 보았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평소에 어떤 책임을 지고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실 이 같은 의식의 저변에는 미리 설정된 법칙과 부여된 원칙에 따라 별다른 의식 없이 삶을 진행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샤르트르는 그 어떤 존재도, 법칙도 책임져 줄 수 없는 순전히 나 자신에게만 맡겨진 선택의 책임을 이야기합니다.
이어서 마지막 키워드로 ‘자유’가 언급됩니다. 샤르트르가 볼 때 인간에게 절대적인 책임이 주어진 만큼 절대적인 자유도 주어집니다. 심지어 누군가가 목숨을 위협하며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순간에도 나에게는 그 사람의 강요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실존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이 같은 자유가 무분별한 삶을 조장한다고 보지만 오히려 샤르트르는 무분별한 삶이란 결국 무분별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태, 곧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내려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탈출을 향한 열망
<이종필(감독). (2024). 탈주[영화]. (주)더램프>
이종필 감독의 영화 <탈주>는 실존주의의 네 가지 키워드를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영화는 현실과 내면에서 맞닥뜨리는 실존적 차원의 탈주를 향한 열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휴전선 인근 북한 최전방 군부대에 복무하며 10년 만기 제대를 앞둔 중사 규남(이제훈 扮)은 북한을 벗어나 철책 너머 남한으로의 탈출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규남의 계획을 알아챈 하급병사 동혁(홍사빈 扮)이 규남이 만든 지뢰 위치 표시 지도를 탈취해 홀로 탈주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부대에서 이를 알아차리고, 곧장 체포된 동혁과 함께 동혁을 말리려던 규남까지 탈주병으로 체포됩니다.
한편, 탈주병 조사를 위해 부대로 온 보위부 소좌 현상(구교환 扮)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규남을 탈주병을 체포한 노력 영웅으로 둔갑시키고 사단장 직속 보좌 자리까지 마련해 주며 자신의 실적을 올리려 합니다. 그럼에도 규남은 탈출을 향한 열망은 내려놓지 않고 본격적인 탈주를 감행하고, 이에 현상은 규남을 향한 추격을 시작합니다.
실패할 자유를 바라는 존재
영화는 꿈을 억압하는 현실로부터 탈주하려는 규남과, 탈주하려는 규남을 뒤쫓는 현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나아갑니다. 규남이 처한 현실은 북한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머물지 않고 작금의 한국 사회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대입과 취업에만 혈안이 될 수밖에 없고 결혼과 출산을 주저하게 되는 우리 사회 청년 세대를 두고 나약하고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일부 기성세대의 모습이, 자유를 향해 몸부림치는 규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의 모습처럼 다가옵니다. 더불어 개인의 내면에 비추어 본다면 꿈을 향해 도전할 것인지, 현실과 타협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순간으로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극 중 북한이나 남한이나 평범한 이들의 현실은 다르지 않다고 자조 섞인 주장을 펼치는 현상을 향해 규남은 ‘실패할 자유’를 언급합니다. 규남이 실패할 자유를 언급하며, 영화는 단순히 규남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서 혹은 정치적 자유를 갈망해서 탈주하려는 것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규남의 탈주는 규남 스스로 ‘선재된 본질에 대한 설정 없이 열려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이를 선택하기 위해 내린 결단에서 가능해졌습니다. 그리고 규남의 이 같은 선택에는 근본적인 차원의 책임과 자유가 곁들여져 있습니다. 그렇게 영화는 본질에 앞서는 존재로 거듭나길 주저하는 이들로 하여금 다른 이의 등을 떠밀기 급급한 세태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듯이 다가옵니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바라며
본질에 앞서는 존재로 거듭나고자 애쓰는 영화 속 규남의 모습에서 타의에 의지하고 타성에 젓기 쉬운 우리 신앙에 대해 성찰할 수 있습니다. 대개 우리는 신앙의 시작 단계부터 타의에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세례를 받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도 나 자신의 의지로 시작하기보다는 타인의 권유나 타인이 보이는 모습에서 영향을 받아 세례받기를 결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신앙생활 안에서도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해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미사 안에서 전달되는 강론은 집전자로부터 일방적으로 전달되기에 나 자신의 의견이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도 공동체에 오래 몸담아 온 신자들, 특히 나이가 지긋한 남성 신자들이 주축인 사목회에서 내려진 결정이 한 해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본당 활동을 좌지우지하기에 이제 갓 신앙에 몸담은 이들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거나 의견을 개진할 기회를 전혀 제공받지 못한 채 정해진 일정에 수동적으로 따라갈 따름입니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저 역시도 제가 꺼내 놓은 이야기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신부로 지내는 시간 안에서 주님을 향한 열정을 품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부로서 교회 공동체 안에 이미 정해진 흐름과 구성, 일정, 분위기 안에 안주한 채 새로이 거듭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데 소극적일 때가 많습니다. 또 신부에게 주어진 권한과 신부라는 존재에 새겨진 권위에 기댄 채 새롭게 전달되는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적도 적지 않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또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일상 안에서 무언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거나 주님 앞에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 드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혹은 그러한 느낌조차 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그만큼 주님의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연하게 자리 잡은 흐름에서 역류할 수 있는 용기, 안주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낯설고 멀게 다가오는 길을 향한 여정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그 용기를 우리 시대에 바라실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