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문화의 시작
수십 년간 지속된 그리스 내 해양 세력과 내륙 세력의 내전이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국력은 전체적으로 소진되고 문화와 사상이 융성했던 그리스 고전기도 막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스의 북쪽 ‘변방’에 위치하였고 문화적으로 뒤처지고 이질적이었던 마케도니아는 필리포스 2세 때 급속도로 군사력을 팽창해 그리스를 위협했고, 그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테바이까지 점령하여 그리스를 통합한 후, 놀라운 속도로 영토를 확장합니다. 그는 근동과 인도 일부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세우고 그리스 문화권을 확장하는 한편, 새로 접촉한 지역의 문화들을 그리스 문화 안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혼합주의적’ 문화를 탄생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멈추지 않고 정복 전쟁을 계속하지만, 갑자기 병을 얻어 젊은 나이로 죽게 됩니다. 그의 사후 신하들 사이의 처절한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제국은 여러 개로 분열됩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혼합주의적이고 다원적인 문화의 흐름은 끊기지 않고 그 후 수백 년간 이어지고 발전합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기 이후 열린 시대는 문화적으로도 그리스 고전기와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이를 19세기 독일 역사학자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이 최초로 ‘헬레니즘’이라 명명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사용되는 개념이 됩니다. 드로이젠은 ‘헬레니즘’을 연대기적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기원전 323년)에서 시작해서, 카이사르 암살 이후 두 번째 삼두정치의 혼란기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패전하는 것으로 종결을 맞고,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로 즉위하여 로마의 제정이 확립되는 때(기원전 31년)까지의 긴 시기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실 헬레니즘 시대에도 이미 그리스의 정치적 위치는 몰락했고, 로마가 정치, 군사적으로 지중해 세계 전체에서 패권을 잡았지만, 문화적, 사상적, 예술적 측면에서는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문화가 더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헬레니즘 시대만이 아니라 로마 제정 시대에도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고 로마제국 역시 문화적으로는 지속적으로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헬레니즘은 위대한 그리스 고전기 사상과 예술의 종언을 의미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문화적 부흥기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아테네와 이오니아 반도, 시칠리아 등 기존의 문화적 중심지뿐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등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통해 그리스와 근동 문화가 만나 생겨난 여러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에서 다양한 철학과 사상이 꽃피고, 교양을 전수하는 체계적인 학교와 교육 방식이 자리를 잡은 교양에 있어 풍요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스토아 철학, 에피쿠로스주의, 신플라톤주의 등 이후 중세 철학과 영성, 근대 철학 등에도 큰 영향을 미친 철학들이 이 시기에 태어납니다. 헬레니즘의 사상은 그리스 고전기에 비하면 훨씬 더 다양했으며 도시국가에 매이지 않은 ‘코스모폴리탄’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헬레니즘 철학과 사상을 풍부하게 섭렵한 후, 마침내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로 철학을 할 수 있는 초석을 놓은 로마의 철학자가 키케로입니다.
철학자 키케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106년-기원전 43년)를 철학자로 언급하는 것이 좀 의외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로마 역사에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주로 카이사르의 집권으로 결말에 이른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일차 삼두정치와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결성한 이차 삼두정치를 거쳐 마침내 옥타비아누스가 최종 승자로서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카이사르’)의 자리에 올라 로마 제정을 시작하게 되는 격동의 시기에 일관되게 공화정과 원로원의 입장을 옹호하다 결국 살해당한 비운의 정치가로 알고 있겠지요. 또한 귀족 출신이 아닌 그가 정치인으로서 화려한 공적 경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법률가이자 연설가로 얻은 명성이 결정적이었으며 그의 명문장들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함께 고전 라틴어의 모범으로 꼽힌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키케로가 정치가이자 연설가로서 공적이며 실천적인 삶을 살며 당대에 끼친 영향력보다 후대인들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여가’의 시간에 이룬 학문적이고 문화적인 업적이라 하겠습니다. 키케로는 라틴 세계의 정신적이고 인문학적 수준이 그리스 문화에 필적하는 성숙한 차원에 오르게 하는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의 저서들은 라틴어 문화권에서 긴 세월 동안 교양 그 자체로 인정받았고 역사적 의미를 넘어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라틴 고전 문학과 사상의 정수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뛰어난 연설과 명문장을 남기고 정치사를 증언한 저술가를 넘어 아마도 처음으로 등장한 ‘로마인’ 철학자라 할 만합니다.
당시 로마에선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지식과 법률, 도구로서의 수사학 등은 그 중요성을 높이 평가받고 있었고, 그리스 비극에서 영향을 받아 라틴어로 창작된 문학 작품 역시 로마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철학의 가치와 효용에 대해서는 로마의 많은 지식인과 정치가들은 여전히 회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노老카토와 같은 폭넓은 교양을 가진 존경받는 정치인도 그리스 철학의 전통이 로마의 기풍에 위협을 주고 나약하게 할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키케로는 일찍부터 철학을 사랑했고 그 가치를 잘 알고 옹호한 인물이었습니다. 로마 근교에 있는 아르피눔의 기사 집안에서 태어난 키케로는 아들이 교육을 통해 정치적으로 입신양명하기를 바랐던 아버지 덕에 일찍부터 로마에서 언어와 수사학, 철학, 법학 등의 기본 과목 등을 배우며 이후 법률가와 정치가로 이름을 떨칠 능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철학가로서 키케로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당시에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있던 여러 저명한 철학자들이 로마로 이주해 가르침을 펼쳤던 사실이었습니다. 또 정치가로 입문하기 전에는 직접 아테네나 로도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로 가서 다양한 유파의 철학자들 밑에서 공부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키케로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소요학파 등 여러 학파의 중요한 계승자들에게 배움을 얻고 토론했는데, 무엇보다도 아카데미아 학파에 속한 필론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스스로를 ‘아카데미아 학파’에 속한 철학자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다른 학파의 학설들에도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들은 수많은 그리스 철학 대가들의 강의와 당시에는 아직 유실되지 않은 그들의 저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여러 철학 학파의 중요 논점과 가르침을 명료하고 풍부하게 정리하고 비교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대부분 원전이 소실된 후기 고대 철학의 여러 철학 이론이 키케로의 저서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보존되고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키케로는 무엇보다 로마인들이 희랍어가 아니라 라틴어로 철학을 꽃피울 수 있는 근간을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로마인들이 그리스 정신 문화를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수용하고 계승하는 가교 역할을 한 위대한 전달자이자 해석자였고, 지식과 안목을 겸비한 탁월한 교양인, 그리스 수사학과 철학의 핵심 개념에 해당하는 훌륭한 라틴어 용어를 발굴하고 창조해 낸 능숙하고 섬세한 번역가였습니다.
철학자로서 키케로가 기여한 주된 관심 분야는 윤리학과 정치학, 그리고 법철학을 망라하는 ‘실천철학’입니다. 그가 그리스 철학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적절한 라틴어 개념어를 고민하며 체계적으로 저술한 저서들은 중세와 근세에 이르기까지 고전 그리스 시대의 위대한 철학 저술 못지않게 크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철학 주저라 할 《의무론》이 좋은 예입니다. 이 작품은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만큼이나 중세와 근대의 도덕철학에 있어 근간이 되는 철학서로 인정받았고, 계몽주의와 비판철학을 완성한 칸트의 도덕 이론에도 지대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한편, 키케로에 대해 그가 그리스 철학을 라틴 세계에 전한 공은 크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자라 부르기에는 독창성과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오랫동안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여러 훌륭한 연구를 통해 ‘철학자 키케로’의 진면목이 비로소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가 선택하고 수행하는 주제와 탐구 방식을 보면 그의 철학자로서 가진 훌륭한 자질을 실감하게 됩니다. 키케로가 다양한 철학을 방대하게 섭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집하고 나열만 하거나, 혹은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거나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소크라테스 이래 고대 실천철학의 근원적 물음이 된 ‘좋은 삶’에 대해 확고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합니다.
철학자로서 키케로는 일반적 견해를 피력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하고 일관성 있는 방법론을 통해 이러한 철학적 문제를 다양하게 조망하고 논증을 전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논증을 통해 현재 단계에 다다른 견해 역시 신중하지만 확실하게 제시합니다. 역시 그의 철학 주저 중 하나로 꼽히는 《최고 선악론》을 읽어 보면 키케로 철학이 지닌 논증 방법론의 성실함과 다양한 후기 고대 철학에 대한 식견, 철학적 주제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진리의 추구와 그러한 진리로 가기 위한 적절하고 세련된 언어의 기술을 조화시키려 하며 철학과 수사학을 대립적이 아니라 상보적으로 이해하는데, 여기에 그의 철학적 독창성과 기여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을 공공의 일에 투신하는 정치가로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철학에 집중적으로 몰두한 것은 정치에서 자의든 상황에 의해서든 물러나서 여가의 시간을 가졌을 때였던 건 사실이고 이것이 후대의 철학사가들이 철학자로서의 키케로를 과소평가하게 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철학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고자 고민하는 현대의 문제의식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모범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키케로가 당시 후기 고대의 다양한 철학적 흐름을 다양하게 검토하고 한 학파에 속해서 독단적인 입장을 가지기보다는 여러 학파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 열린 태도로 숙고하고 토론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이는 수많은 사상과 사유를 대하면서, 적절한 조화를 추구해야 하는 ‘복수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공감과 영감을 줍니다.
키케로는 스스로 신-아카데미아 학파에 속해 있다고 밝히면서 철학적 논증과 인식의 방법인 ‘회의’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렇다고 회의주의를 ‘독단적’으로 관철하여, 모든 문제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거나 여타 학파의 가르침을 독단적이라고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논증은 수사학과 연설의 대가답고, 회의주의의 긍정적 측면도 잘 보여 줍니다. 성급하고 독단적으로 확고한 결론에 이르거나, 아예 진리에 이르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더 ‘개연성’ 있는 견해에 도달하려 애쓰며 순차적으로 진리에 접근합니다. 그는 행복과 좋은 삶, 의무와 도덕성과 같은 윤리학의 물음에 있어서는 오히려 스토아 철학의 견해에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학파에서 익힌 회의주의와 신중함을 견지하면서도, 일상의 실천에서 주저하지 않고 확고하게 덕과 의무가 좋은 삶의 핵심임을 ‘승인’합니다.
한편, 키케로는 영혼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이 속한 신아카데미아 학파나 공감을 가졌던 스토아 학파의 견해가 아니라 자신이 가장 경애했던 플라톤이 가르치는 대로 ‘영혼의 불멸성’에 마음을 둡니다. 다만 플라톤처럼 영혼 불멸의 근거로 ‘신화’(뮈토스)를 끌어들이지는 않습니다. 대신 플라톤이 그려 낸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의 삶에 대해 ‘희망’을 갖듯이 신의 섭리와 영혼의 불멸과 덕에 충만한 좋은 삶을 산 사람이 받을 보답에 대해 ‘요청’하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의 철학적 입장인 회의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영혼 불멸’은 인식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으나, 인간에게 결정적인 의미가 있는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 ‘판단 중지’하는 대신 ‘요청’의 방식으로 긍정하는 키케로의 입장은 여러 면에서 근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인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를 떠올리게 합니다. 칸트 역시 자신의 비판철학에 입각해서 중세철학과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같은 대륙의 합리론에서 시도한 신 존재 증명의 타당성에 대해 ‘사변철학’의 견지에서는 철저하게 비판하지만, 이후 ‘실천철학’의 차원에서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피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키케로의 죽음 이해는 과학적 발전과 탈신화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한 현대 세계에서 죽음을 삶의 소멸이 아니라 완성으로서 사유하고, 또한 영혼 불멸을 통한 죽음 이후의 희망을 갖는 것이 독단이 비합리가 아니라 ‘회의’하는 이성이 사려 깊게 선택하는 최종 결론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키케로의 죽음에 대한 성숙한 시각과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과 희망은 죽음에 대한 대화편인 《투스쿨룸 대화》와 친구 아티쿠스에게 헌정한 단편 《노년론》에 가장 집중적이고 인상적으로 전개됩니다. 이 두 편의 작품은 고대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죽음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작품에 속하고,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키케로는 일독의 가치가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도 그가 키케로의 철학을 권유하는 저서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젊은 시절의 정신적 방황에서 벗어나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키케로를 읽는 것은 고대 세계의 정신적 교양의 진수를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더구나 플라톤의 정신을 이어받아 ‘영혼 불멸’에 대한 희망을 논하는 그의 글들은 그리스도교의 죽음 이해와 관련해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최근 우리말로도 키케로의 원전이 차례로 번역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키케로를 통해 서양 교양의 뿌리를 만날 수 있는 좋은 시기라 생각합니다.
∙ 함께 읽어 볼 책들
키케로, 《투스쿨룸 대화》, 김남우 옮김, 아카넷, 2021
키케로, 《노(老)카토 노년론》, 김남우 옮김, 아카넷, 2023
키케로, 《의무론》, 임성진 옮김, 아카넷, 2024
앤서니 에버렛, 《로마의 전설 키케로》, 서해문집, 2003
가스통 부아시에, 《키케로와 친구들》, 정진국 옮김, 닫집,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