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고전기 비극 문학
그리스 고전기의 위대한 세 명의 비극 작가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524-456/455), 소포클레스(497/6-406/5), 에우리피데스(기원전 약 484-약 406)는 호메로스 이후 수백 년이 지나 그리스 정신을 다시금 정점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리스 고전기가 끝난 후에도 그리스 비극 걸작들은 헬레니즘과 로마 제정 시대를 아우르는 후기 고대 시대, 르네상스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문화사에서 교양 형성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많은 문학평론가와 문화사는 문학 형식의 파격과 언어의 장려함에서나, 인간의 운명을 바라보는 철학의 심오함과 등장인물이 겪는 감정의 밀도에서나 그 이후의 어떤 서양 문학도 그리스 고전기 비극 문학을 뛰어넘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20세기의 가장 박학한 인문학자이자 문학 평론가 조지 슈타이너는 근대 사실주의 소설이 인간의 ‘비극적’ 상황을 집요하게 주제로 삼지만, 그리스 비극의 성취에 비하자면 그 깊이와 숭고함에 있어 빈곤하다고 결산합니다.
그는 근대 문학에서 ‘비극의 죽음’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비극 문학에 대한 이런 찬사들이 과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 비극을 진지하게 살펴본 사람들이라면, 《오레스테이아 3부작》(아이스퀼로스),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소포클레스), 《메데이아》와 《트로이아 여인들》(에우리피데스) 같은 위대한 그리스 비극들이 오늘날에 작가와 연구가들을 위한 역사적 참고 사례로서만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시대의 독자와 관객을 놀라게 하고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압도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 비극은 ‘현대적’입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대에도 그리스 비극은 인간 존재와 삶에 깃든 ‘비극성’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곱씹고자 하는 많은 진지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문학만이 아니라 영화, 드라마, 음악극, 나아가 현대 미술과 무용에서 탁월하게 표현된 ‘비극적 서사’를 만나게 되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리스 고전 비극을 떠올리는 것은 드물지 않습니다. 그리스 고전기 세 비극 작가의 작품들은 ‘비극’ 예술에 있어 기원일뿐더러, 도달하거나 능가할 대상이 아니라 오직 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원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 작품은 이처럼 서양 문학사와 예술사 안에서 확고한 ‘경전’의 위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서양 철학사에서 인간사와 행위의 본질과 규범을 숙고하는 윤리학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 비극은 종교적 제의에 기원이 있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디오니소스 신을 기념하는 비밀스러운 밀교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연구가들은 이후 비극 장르는 점차 널리 받아들여지고 도시 국가와 부족 공동체 전체를 위한 공식적 종교 제의와도 결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비극은 신화와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수용한 소재와 주제들을 받아들여 단편적 장면들의 총합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유기적인 극적 구조를 가진 서사를 가지게 됩니다.
비극이 꽃피기 시작하던 시기, 아테네에서는 상고사 시대가 끝나고, 고전기 시대가 시작합니다. 비극은 아테네 고전기 시대의 흥망을 함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귀족정과 참주정 시대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 정치가 시작되는 격변기에 비극은 익히 익숙하던 신화와 호메로스 서사시 주인공들의 선택과 행위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 해석합니다. 고전기가 무르익고 민주주의 정치가 본격화되는 정치적 사회적 환경은 비극 문학의 완성에 매우 주요한 영향을 미쳤고, 반대로 위대한 비극 작품의 탄생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그리스 고전 시대 정치적, 문화적, 윤리적 정체성 형성에 매우 큰 의미를 가집니다. 공동체 안에서 ‘정의’의 문제가 비극의 중심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비극을 보는 것은 개인적인 예술적 향유나 종교적 의례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도덕적, 윤리적 인식을 위한 공동체의 중요한 배움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리스 비극의 거장 아이스퀼로스
비극이 그 형식과 내용과 사회적 역할에 있어 획기적 전환을 이루게 된 것은 비극의 3대 거장 중 가장 앞선 시대를 산 아이스퀼로스의 업적입니다.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마라톤 전투의 참전 용사이자 참주제가 민주제로 전환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레스테스의 이야기’라는 뜻을 가진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통해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었지만 고향 미케네로 귀향한 후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한 아버지 아가멤논의 복수를 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 어머니를 죽이게 되는 ‘불의’를 행해야만 하는 아들 오레스테스와 딸 엘렉트라를 통해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 정의와 자비가 공동체의 윤리로 자 리잡는 과정을 그립니다. 아이스퀼로스는 아가멤논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트레우스’ 가문으로 불리는 이 미케네 왕가의 가정 비극을 소재로 그리스인들이 신화와 종교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법과 정의가 지탱하는 공동체의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을 장엄하면서도 인간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영웅적이고 신화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법률과 민주주의적 정치 체제에 따른 지배와 질서가 자리 잡던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윤리적이면서 정치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아테네 도시국가는 ‘공동체’이며 그 정치적 이상은 정의이고, 이는 누구나 복종해야 하는 법을 통해 규범적으로 표현된다는 삶의 기본 원리를 확립시킨 위대한 입법자 솔론의 업적을 문학적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스퀼로스보다 훨씬 후대인 본격적인 그리스 고전기에 활동한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는 페리클레스에 의한 아테네의 영광과 시련을 목격하면서 복잡해진 국가의 목적과 갈등을 이루는 개인의 욕망의 문제, 인간의 자유와 운명의 관계, 도시 국가 사이의 대결, 실정법과 자연법 사이의 충돌 등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주제들을 보다 성숙하고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후 그리스 고전 시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상으로 막을 내리면서, 비극의 전성기도 막을 내립니다.
비극의 중심지 아테네서 이들 대표적인 비극 작가를 비롯해서 비극의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을 통해 사람들을 교화하고 공동체적 교육과 교양의 역할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영감을 받은 예술가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창작 원리를 본격적으로 탐구하면서 밝히고 있듯이, 비극 작가들은 단지 ‘로고스’, 즉 이성적 논증으로서가 아니라 등장인물의 성격과 이야기의 구조, 그리고 언어적 표현으로 감정(파토스)을 움직입니다. 이러한 비극의 효과는 이미 윤리적 차원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극 작품은 사람들을 전율과 경악을 체험하게 하지만,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빌자면 ‘정화’(카타르시스)의 효과를 줍니다. ‘정화’라는 정서적 작용은 단순히 일회적인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익숙하고 무반성적인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 세계를 다르게 보고 인생의 끝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성찰하는 정신적 각성을 뜻합니다. 숭고하고 설득력 있는 뛰어난 비극은 독자 혹은 관객에게 인간의 조건을 냉철하게 대면하게 합니다. 또한 좋은 삶과 인간성의 위대함이 어디 있는지를 깊이 사유하도록 촉구합니다. 이를 통해 단순한 처세나 명성의 추구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 뿌리내린 지혜와 용기가 자라납니다. 이제 사람들은 관습적인 규범이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지침을 넘어 보편적인 도덕 원칙을 찾고 성찰하며, 이에 기초를 두는 삶의 방식을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신적 성숙에서 윤리학이 ‘탄생’합니다. 비극은 그리스인들이 이러한 단계에 이르도록 교육시키고 도야시키는 역할을 했기에, 정당하게 윤리학의 모태라 불립니다.
윤리학의 시작
‘윤리학의 탄생’ 이전에 인간에게 도덕적 규범이나 지침이 없었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모든 문명과 공동체는 의무와 금기, 통념과 규범, 인생사의 지혜에 대한 전승을 가집니다. 그리스 역시 신화로 표현되는 역사 이전 시대와 상고사 시대에도 단편적이지만 여러 도덕적 경구와 잠언들이 전해 옵니다. 또한 서로 독립되어 발전한 고대 문화권들에서도 ‘황금률’ 같은 서로 일치하는 기본적인 윤리들이 발견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고대에 있었던 여러 문화권에서 전해오는 윤리적, 종교적 가르침들이 그 보편성에서 한계가 있는 경우도 많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서양에서 인간사에 관한 총체적이고 본질적인 철학적 사유이자 도덕 원리의 보편성에 근거를 제시하고 그 구체적 적용을 숙고하는 ‘실천철학’으로서 윤리학은 그리스 고전기에 이르러서야 탄생했다고 보아여 할 것입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불멸의 업적입니다. 이들이 확고하게 제시한 ‘덕의 윤리학’은 오늘날까지도 윤리학과 도덕철학의 기틀입니다.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가진 그리스의 도시 국가 아테네에서 그리스 고전 시대의 후반기에 활동한 이들 위대한 세 명의 철학자는 그리스 고전철학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며 철학사의 영원한 ‘클래식’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과 행위와 실천에 대한 철학은 근본적으로 ‘덕의 윤리학’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덕의 윤리학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고 비극 작가들이 인간사의 난제와 비극의 주인공인 ‘영웅’들의 행동을 예리하고 다층적으로 묘사하고 인간 운명과 인간의 선택 사이의 관계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던진 것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아이스퀼로스의 《오리스테이아 3부작》의 첫 번째 책인 〈아가멤논〉의 앞부분에 나오는 구절 하나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이 비극과 윤리학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아이스퀼로스는 신들의 으뜸인 제우스가 인간에게 지혜를 얻게 하는 방식은, 다름 아니라 ‘고통을 통한 인식’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분께서는 인간들을 지혜로 이끄시되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게 하셨으니.
그분께서 세우신 이 법칙 언제나 유효하다네.
마음은 언제나 잠 못 이루고
고뇌의 기억으로 괴로워하기에
원치 않는 자에게도 분별이 생기는 법.
이는 분명 저 두려운 키잡이의 자리에 앉아
힘을 행사하시는 신들께서 내려 주신 은총이라네.”
이는 비극의 중요한 기능에 ‘윤리적 인식’이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한편, 소포클레스의 가장 위대한 비극으로 꼽히는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을 보면, 파국을 남기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는 오이디푸스 왕에 대해 연민과 두려움을 담아 다음과 같이 ‘코러스’가 노래합니다.
“보시오, 저분이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는 더없이 권세가 컸던 오이디푸스요.
그의 행운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은 시민이 있었던가!
보시오, 그런 그가 얼마나 무서운 불운의 풍파에 휩쓸렸는지!
그러니 항상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를 지켜보며 기다리되,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
여기서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처한 ‘인간 조건’이 철저하게 상기됩니다. 윤리학은 이러한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오만함과 비겁함과 불의함의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면서 구체적 삶 안에서 올바르게 행위하며 탁월하게 자신을 실현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며 행복하게 인생을 살아갈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모색합니다. 윤리학은 비극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의 윤리학’은 호메로스와 그리스 비극을 관통하는 전통적 ‘귀족 윤리’에 담긴 ‘탁월함’에 도달하려는 고귀한 지향을 이어받으면서도, 영웅의 명예를 이상형으로 삼는 업적주의를 교정하면서, 보편적 도덕적 가치와 시민의 공동체적 우애와 내면의 조화를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해 주는 덕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탁월함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제 필멸의 인간이 가야 하는 길은 불멸의 명성이 아니라 덕의 함양과 실천에 있게 됩니다.
그리스 비극 문학은 문학사에서나 윤리학사에서나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비극 문학을 읽는 것은 그리스도교 윤리학에서도 이론적 기초가 되는 그리스 고전철학의 ‘덕 윤리학’이 뿌리내린 원천을 알아보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고 비극을 읽고 감상하며 인간 존재의 심연을 문학적으로나마 체험하는 것은 인간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보다 깊고 성숙한 시각을 가질 기회가 됩니다. 특히 필멸하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인간 조건’을 숙고하는 데 있어 비극 문학은 더없이 좋은 안내자입니다. 비극은 깨어 있는 정신을 갖도록 우리를 초대하며 이는 그리스도인에게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사실 그리스 비극이 그리스도교 신앙인에 미치는 정서적 효과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이래로 많은 비판이 있기도 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신앙시나 무훈시에 비해 비극 문학의 가치가 오랫동안 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파스칼의 《팡세》를 읽으며 느끼게 되듯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인간 인식에 있어서도 인간 운명의 비극적 측면은 신앙의 정화를 위해 깊이 묵상할 주제입니다. 현대의 뛰어난 신학자들인 앙리 드 뤼박, 로마노 과르디니,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등이 다시금 인간의 ‘비극성’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남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비극은 신앙인에게도 인간에 대한 보다 더 깊은 이해의 길을 열어주며, 아울러 서양 정신 문화를 이루는 교양의 핵심을 깊이 배우게 합니다.
∙ 함께 읽어 볼 책들
아이스퀼로스, 《오레스테이아 3부작》, 김기영 옮김, 을유문화사, 2015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숲, 2008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 강대진 옮김, 민음사, 2022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이진우 옮김, 문예출판사, 2021
마사 C. 누스바움, 《연약한 선》, 이병신 외 옮김, 서커스출판상회, 2023
천병희, 《그리스 비극의 이해》, 문예출판사, 2002
강대진, 《비극의 비밀》, 문학동네, 2013
김기영, 《신화에서 비극으로》, 문학동네, 2014
최혜영,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 푸른역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