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명의 정신적 기원
호메로스는 그리스 문학의 출발점이고 서구 정신문화의 시원始原입니다. 교양의 개념사를 호메로스에서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20세기 초반에 쓰였지만, 여전히 고대 그리스의 정신사에 대한 해설로서 고전적 가치를 잃지 않고 명저로 남아 있는 베르너 예거의 《파이데이아》를 살펴보면 호메로스가 서구 정신세계의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교양은 역사적으로는 ‘상고기’(上古期, archai)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시기에 활동한 호메로스와 그리스 신화의 가장 오래된 원전이라 할 《신통기》를 쓴 또 한 명의 위대한 서사시 작가 헤시오도스는 그리스인들의 인간관과 신관의 원형을 그려 냈습니다.
이들보다 한 세기 정도 후에 등장한 핀다로스와 같은 위대한 송가 시인,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로 대표되는 이오니아 지방의 자연 철학자들, 신비주의자인 피타고라스 등을 통해 그리스 상고기에 이미 높은 수준의 사유와 문학적 창조력이 개화합니다. 예거와 함께 20세기 고전 문헌학의 대가로 꼽히는 브루노 스넬의 표현을 빌리지면 이 시기는 ‘정신의 발견’이 일어난 때입니다.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속주’인 소아시아 지방과 시칠리아에서 문화적 부흥이 일어난 후, 상고기가 막을 내릴 즈음 여러 법령을 통해 그리스 본토의 도시 국가의 정치 체제가 정비되었고, 본격적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고전기가 도래합니다. 고전기가 정치적으로 존속한 기간은 몇 백 년에 불과했지만, 이 시기의 철학적, 문화적, 정치적 유산은 이후 오늘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서구 문명의 ‘불멸의’ 정신적 기반이 됩니다.
상고기 이전의 그리스 문명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유물들과 신화적 전승을 통해 추정할 뿐입니다. 역사가들의 그리스의 시대 구분에 따르면 청동기와 철기 시대를 아우르는 시기에는 기원전 3000년에서 1000년까지의 크레타섬에 미노스 문명이 있었고 기원전 1600년에서 1150년까지는 미케나이 문명이 있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그리스군의 영웅들은 미케나이 문명에 속한 이들입니다. 기원전 1400년경 미노스 문명의 중심 도시인 크노소스가 멸망한 것으로 보이고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무대가 되는 트로이의 멸망은 이보다 백 년 정도 후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후 기원전 1100년에서 700년 사이에 그리스 본토에 상고기와 고전기의 주역이 되는 도리스인들이 이주하고 소아시아와 시칠리아 등에 속주가 건설되면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역사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상고기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사라진 미노스 문명이나 미케네 문명은 고고학적인 유물을 통해서만이 전해지며 상고기의 그리스인에게도 구전되는 이야기들을 통해 단편적으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776년에 시작된 올림피아 경기는 상고기를 맞이한 본토 그리스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이어 기원전 750년경부터 그리스 알파벳의 초기 형태가 사용되던 것으로 보이고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세력을 확장합니다. 스파르타의 리쿠로고스나 아테네의 솔론 같은 위대한 입법가와 정치가들이 등장하면서 국가 체제를 결정짓는 중요한 법률들이 제정되고, 비로소 ‘정의’의 관념이 정치에 있어 중요한 기준으로 인정됩니다.
상고기의 마지막에 시기에 일어난 중요한 정치적 변동은 545년에서 510년에 걸친 아테네의 참주정이 끝나고 마침내 508년경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민주정이 도입한 것과 스파르타가 내륙 지역 도시 국가들을 중심으로 505년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완성한 것입니다. 이제 고전기 시대 내내 지속될 아테네의 델로스 중심으로 한 해상 세력과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축으로 한 내륙 세력 사이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호메로스는 상고기가 무르익은 700년경부터 활동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수백 년 전에 잊힌 역사이자 구전되는 이야기와 전설들에서 단편적으로 전해져 오는 트로이 전쟁을 서사시라는 구전 문학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렸고, 그리스인들의 정신적 사유와 가치관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의 서사시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에 대한 언급이 수없이 나오지만, 여기서 주제가 되는 것은 신에 일방적으로 종속된 신화적 세계관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과 행위입니다. 그는 그리스 신화, 원시 사회의 종교와 풍습 등에 배어 있는 가치관을 서사시라는 이야기 안에 종합하여 우러르고 본받을 인간형을 조형하였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그리스인들에게 문학적 즐거움만을 준 것이 아니라, 독보적인 교사이자 정신적 양육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파이데이아’라는 용어에 교양, 도야, 교육, 인식 등의 다양하고 심오한 의미가 온전히 담기고 명료한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그리스 고전기와 그 이후의 헬레니즘 시대이지만, ‘파이데이아’라는 개념으로 포괄하게 되는 인간관과 세계관, 그리고 교육과 도야의 방향은 이미 상고기에 나타난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예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는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문명을 관통하여 고대 세계 내내 교양의 양육자이자 모태의 역할을 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호메로스는 상고 시대에 기풍이자 습속이었던 ‘귀족 윤리’를 배경으로 ‘탁월함’과 ‘훌륭함’을 구현한 영웅들의 서사시를 들려주면서, 신들의 의지와 운명을 마주한 영웅의 태도, 영웅의 선택과 행위가 가져오는 귀결들을 통해 인간 삶과 도덕성을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호메로스의 인간 행위에 대한 관찰과 평가에는 청동기와 철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득한 시절 고대 사회의 관습과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세계관과 인간관이 배경이지만, 상고기에 사람들이 새롭게 눈뜬 높고 깊은 정신적 차원의 통찰이 주도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아직 명료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숙고되고 탐구되어야 할 새로운 인간과 세계, 신에 대한 질문들이 그의 서사시에 담겨 있습니다. 이후 고대의 철학과 문학은 호메로스가 그려 낸 인물들을 통해 제기되는 인생과 윤리에 대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점점 더 성숙해지고 심오해져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호메로스 서사시의 영향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고대뿐 아니라 중세와 근대까지도 서양 정신 문화의 기초이자 교양의 시금석으로 지속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독일에서 고전, 낭만 시대 이후 일어난 ‘교양’과 ‘인문학’의 부흥에도 호메로스의 재발견과 새로운 번역 작업, 문예학적 연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독자에게도 호메로스를 읽는 것이 문화사적이고 철학사적인 차원이나 낯선 고대 문헌에 대한 학구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 삶과 관련하여 실존적이고 현재적인 의미가 있는지도 물어야 할 차례입니다. 이는 고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문 교양이 오늘에 여전히 삶의 길을 밝히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호메로스에 매료되고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와 대화하고 대결하며 현대인이 직면하는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찾는 데 있어 호메로스에게 영감을 얻고 있는 수많은 사상가와 예술가들이 이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의 간결하지만 폐부를 찌르는 글인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이러한 시도의 탁월한 예시입니다.
호메로스가 여전히 우리들에게 절실하다는 것을 친절하게 소개하는 글로는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최근에 나온 실뱅 테송의 책도 추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오늘을 위한 호메로스 읽기’를 묻는 분들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오딧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의 고뇌와 모험을 들려주는 《오딧세이아》 전반부 첫 네 권을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모두 스무 권으로 되어 있는 《오딧세이아》에서 비중 있는 분량으로 오딧세우스의 모험 이전에 그 아들의 모험과 성숙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으로 느껴집니다. 방황하고 의기소침하거나,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있는 오늘의 많은 젊은이에게 이 대목은 어느 현대의 사상 이상으로 깨우침을 줍니다. 이미 루이 14세 시대에 위대한 영성가 페늘롱 주교는 《텔레마코스의 모험》에서 텔레마코스가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도 한 인간의 인격적 도야를 위한 이상적 모범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저서 역시 고풍스럽기는 하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일독의 가치가 있습니다. 보다 쉽고 친근한 글로는 신앙인을 위해 텔레마코스를 성서의 인물들과 함께 오늘의 시대에 희망과 인내의 덕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에피코코 신부의 책을 권합니다.
∙ 함께 읽어 볼 책들
호메로스, 《일리아스》, 이준석 옮김, 아카넷, 2023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이준석 옮김, 아카넷, 2023
강대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 그린비, 2019
강대진,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읽기》, 그린비, 2020
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김재홍, 김남우 옮김, 그린비, 2020
폴 카틀리지, 《고대 그리스》, 이상덕 옮김, 교유서가, 2019
시몬 베유,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이종영 옮김, 리시올, 2021
실뱅 테송, 《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 백선희 옮김, 뮤진트리, 2020
프랑스와 드 페늘롱, 《텔레마코스의 모험》 1, 2, 최병곤, 김중현 옮김, 2007
루이지 마리아 에피코코, 《텔레마코스》, 김성봉 옮김, 바오로딸,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