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데크’, 다시 정의로워져야 할 시간

성경 이야기

‘체데크’, 다시 정의로워져야 할 시간

법과 판단을 넘어 올바른 관계를 세우는 성경의 정의

2026. 0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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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성경의 단어들 시리즈의 아티클로 탈진실의 시대, ‘에메트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에서 이어집니다. 👉 전편 읽기

 


 

🔍 10초 안에 읽는 핵심 포인트

 

✔ 히브리어 체데크는 법적 올바름을 넘어 하느님과 이웃, 피조물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정의다.

✔ 진정한 정의는 약자의 몫을 돌려주고 소외된 이를 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는 데 있다.

✔ 자기 확신으로 타인을 단죄하는 자기 정의를 넘어 관계를 살리는 정의를 살아 내야 한다.

 


 

정의가 무엇이기에

 

최근 들어 정의라는 단어에서 종종 피로감을 느끼곤 한다. 특정 정치적 진영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이고, 각자 자기편의 주장을 정의라 외치며 상대방의 정의는 불의로 규정한다. SNS에서는 소위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을 자처하는 목소리가 넘쳐나지만, 그것이 과연 보편적이고 진정한 정의인지 아니면 단지 분노와 원한을 방출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교회 안에서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영적 경험이나 신앙생활에 대한 확신은 때로 혹은 우리의 방식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잣대 삼아 타인을 단죄하는 무기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과연 무엇일까? 히브리어 단어 체데크(צֶדֶק)로 돌아가 그 어원과 의미부터 살펴보자.

 


 

곧음, 그리고 올바른 관계를 세우는 정의

 

체데크의 어근 צ-ד-ק(tz-d-q)의 일차적 의미는 곧음(straightness)’이다. 굽지 않은 것, 비뚤어지지 않은 것.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기하학적 비유가 아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체데크는 만물이 하느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와 관계를 지키는 상태를 가리킨다. 누군가 체데크 안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이웃, 피조물과 올바른 관계 안에 있다는 뜻이다.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들을 보면 이 깊이가 더욱 선명해진다. 가난한 이를 돕는 구제또는 자선을 뜻하는 체다카(צְדָקָה)정의와 같은 뿌리를 공유하며, 이는 가난한 이를 돕는 행위를 마땅히 그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되돌려주는 정의의 행위로 바라보는 히브리적 사고를 반영한다.

 

의인(義人)’을 뜻하는 차디크(צַדִּיק)도 같은 어원에 뿌리를 둔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마태 1,19)의 태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 의로움은 단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넘어서 주변 관계를 섬세하게 살피고, 배려하며 살려 내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한편 신명기 1620절은 너희는 정의, 오직 정의만 따라야 한다(צֶדֶק צֶדֶק תִּרְדֹּף).”라고 이야기한다. 탈무드(Sanhedrin 32b)는 이 반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하나는 판결을 위한 정의(justice in judgement), 다른 하나는 타협을 위한 정의(justice in compromise).”

 

실제로 히브리어 어근 ṣdq진실을 말하다라는 뜻의 아랍어 ṣadaqa와도 연결되는데, 이는 고대 근동 사회 안에서 정의와 상호 간의 진실된 소통이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 준다.

 


 

미쉬파트체데크’, 정의의 두 차원

 

구약에는 정의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단어가 등장한다. 미쉬파트(מִשְׁפָּט)가 바로 그것이다. 이 단어는 체데크와 자주 짝을 이뤄 등장하지만(아모스 5,24; 시편 33,5 ), 그 결은 분명히 다르다.

 

미쉬파트가 법적 판결, 법정에서 적용되는 규칙으로서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절차적 공정함이라면, 체데크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설령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더라도, 과연 그것이 참으로 올바른가를 다시 한번 묻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쉬파트가 모두에게 같은 규칙을 적용하는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라면, 체데크는 약자가 실질적으로 번성할 수 있도록 돕는 의로움(righteousness),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인 셈이다.

 

절차 이면의 의도와 그것이 가져올 결과까지도 고려하는 체데크가 없으면, 미쉬파트는 단지 가진 자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장치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이것이 법적 판결로서의 정의인 미쉬파트만으로는 부족한 이유다. 나봇의 포도밭 사건에서처럼 말이다.

 


 

나봇의 포도밭 사건

 

열왕기 상권 21장의 나봇 이야기는 의로움과 불의가 어떻게 충돌하는지 가장 생생하게 보여 준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밭을 탐냈고, 법적으로 정당한 대가를 제시했다. 그러나 나봇에게 조상의 땅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유산이자 공동체의 뿌리였다.

 

나봇이 그 요구를 거절하자 왕비 이제벨은 왕의 인장과 귀족들의 증언을 이용해 그를 역모죄로 몰아 살해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왕의 소원대로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는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엘리야를 보내시어 그들을 엄중하게 심판하신다.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또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1열왕 21,19)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는 이 나봇 이야기를 강론의 중심에 놓으면서, 4세기 로마 사회의 부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가난한 이에게 무언가를 줄 때, 당신은 당신의 것을 선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모두를 위해 공동으로 주어진 것을 당신 혼자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은 모든 사람의 것이지, 부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성 암브로시오, 《나봇에 대하여(De Nabuthe)12,53)

 

이 강론의 핵심은 가난한 이에게 내어 주는 자선이 단지 부유한 이의 덕스러운 선행이기 이전에, 마땅히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되돌려주는 분배적 정의의 행위라는 데에 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한가? 인간이 자본의 시스템 안에서 소비재처럼 사용되다 버려지는 것, 힘 있는 자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약자를 착취하는 것.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지 않은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재구성

 

우리가 정의를 낯설고 딱딱하게 느끼는 까닭은 그것을 대개 법정의 언어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재판, 판결, 처벌……. 이것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정의의 이미지다. 그러나 히브리어 체데크는 본질적으로 관계의 언어.

 

각자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지 않는 것, 공동체 안에서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정의(체데크)가 만물이 본래 있어야 할 모습인 평화(샬롬)와 짝을 이루는 이유이다.

 

"정의 없이는 참된 평화도 없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바티칸 시국 법원 제94차 사법 연도 개막 연설, 2023)

 

"참된 정의는 사람들이 각자 내리는 결정에서 의로울 때에 그들 삶 안에서 이루어지고,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을 위한 공정을 추구하는 가운데 드러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Gaudete et exsultate)》, 2018)

 

"성경의 위대한 전통은 모두에게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명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필리핀 정부 당국자 및 외교단과의 만남 연설, 2015)

 


 

정의를 병들게 하는 독소, ‘자기 정의

 

오늘날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는 내가 옳다라는 지독한 자기 확신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갖가지 논쟁이 들불처럼 번지는 이유도 대개 여기에 있다. 나의 의견과 다르면 맹렬히 비난하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에게는 강한 동질감을 느끼며 일종의 집단적 확신에 빠져든다.

 

종교와 신앙의 공동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자신의 영성적 확신과 실천 방식만을 절대화한 채 그것을 잣대 삼아 타인의 믿음을 함부로 재단하고,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소위 우리의 정의를 확인하려는 유혹은 교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공동생활》에서 이 위험을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자체보다 그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 개인적 의도가 정직하고 진지하며 희생적일지라도, 결국에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가 되고 만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야만 유지되는 정의는 이미 정의로서의 본질을 상실한 것이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정의의 탈을 쓴, 죄와 불의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2코린 11,1415)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나의 삶을 지탱하는 관계들은 진정 올바른가? 내가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들이 혹시 다른 이의 포도밭을 함부로 빼앗은 결과는 아닌가? 내가 정의라고 부르짖는 목소리가 사실은 오직 자신의 이상과 권익만을 대변하는 자기 정의의 우상은 아닌가?

 

우리는 종종 정의를 법정의 시비나 논쟁의 승리 속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진정한 정의는 우리를 사랑하여 죄 없이 수난받으신 예수님의 길, 그분의 겸손과 십자가의 어리석음 속에서 드러나며,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부른다.

 

그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그 고난에의 참여를 살아 낼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체데크, 곧 하느님 나라의 정의 안에서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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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소속으로 현재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 살아계신 하느님의 음성이 인간 언어의 희미한 잡음을 넘어 선명하게 울리도록, 마치 오래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 조심스러운 손길과 눈길로 성경을 읽고, 되새기며, 이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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