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박해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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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의 서막

‘신유박해’의 시대적 배경 이해하기

2024.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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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사에는 크게 일어났던 4대 박해가 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입니다. 100년도 채 안되는 사이 무려 4번의 박해를 통해 적게는 1만 명, 많게는 3만여 명의 신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습니다.

 

조선의 정세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박해의 가장 큰 요인은 ‘유교 문화와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갈등을 심화시키고 천주교 신자들을 매국노賣國奴라고 낙인찍게 된 원인은 황사영과 그의 백서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천주교 박해의 시작을 알렸던 ‘신유박해’의 배경과 진행 상황을 살펴봅시다.

 

먼저, 당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배층이었던 양반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하였습니다. 성리학의 관념적인 철학의 세계는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을 주었습니다. 백성들은 중세적 성리학의 교조주의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갈구했습니다. 그 ‘무엇’은 천주교天主敎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양반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더욱 확대시키려고 붕당(朋黨)을 형성하고,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당파 간 세력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붕당은 점차 사적인 성격이 강해졌습니다. 정치적인 활동에서도 개인이나 가문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우선하는 경향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과 상인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은 국가에 대한 불만이 점점 심해져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이 커졌습니다. 복잡하고 어수선한 조선 후기에 천주교가 구원의 학문으로 지식인층과 소외 계층에게 각광받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천주교는 처음에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선교사의 직접적인 도움 없이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이 지은 한역서학서들을 통해 신앙이 전해진 것입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가지고 돌아온 천주교 서적들을 통해서 이벽은 천주교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해소하였고 1784년 겨울,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과 함께 이승훈에게 대세를 받습니다.

 

천주교는 날로 커져 갔습니다. 이승훈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지도부들은 교세를 유지하려면 그에 걸맞은 지도층, 즉 성직자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1786년 가을, 북경교회와 유사한 형태로 사제단을 구성하고, 다양한 성사들을 교리서에 적힌 대로 성직자의 집전하에 거행하기로 하고 먼저 이승훈을 신부로 선출합니다. 추가로 신자 10명을 더 뽑아 신부로 임명하여 미사를 거행하고 견진성사를 집전하게 됩니다.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곧 평신도가 성사를 집행하는 것이 옳은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십계명에 위배되지 않는지, 그리고 서양 신부를 파견할 수 있는지 세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북경 주교에게 문의할 적임자로 윤유일을 선정합니다. 그의 노력은 조선 최초의 선교사 신부, 주문모를 영입하는 데 영향을 줍니다. 그 후 교회는 가성직 체제의 조직에서 벗어나 진정한 교회로 기능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주문모 신부는 1795년 성토요일에 세례성사를 주고 보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절에는 부활 첫 미사를 봉헌합니다. 또한 필담으로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지방 순회에도 나섰고, 1795년 6월(음력 4월)에는 양근에 있는 윤유일의 집을 거쳐 고산의 이존창과 전주의 유관검 집을 방문한 뒤 상경하였습니다. 이 기간에 황사영도 주문모 신부를 만납니다.

 

이러한 와중에도 정치적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천주교와 서학 등에 대해서 비교적 온건한 정책을 폈던 정조가 죽고 나서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박해의 방아쇠를 당기는 결정적인 사건인 책 궤짝 사건(책롱사건, 冊籠事件)이 일어나게 됩니다.

 

서울에 머무르던 정약종은 송재기(宋再紀, ?∼1802) 집에 맡겨 두었던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이 담긴 책 궤짝을 더욱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 궤짝의 내용물이 공개되었고, 이를 계기로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한 서막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정약종을 비롯한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 등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정치적인 대립 속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습니다.

 

책 궤짝 사건을 기준으로 본격적인 신유박해가 시작되면서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와 충청도 등지로 박해가 확산되었으며, 경기도에서는 주로 양근陽根, 광주廣州, 여주驪州, 충청도에서는 내포內浦, 전라도에서는 진산珍山, 전주全州 등에서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주문모 신부도 안전할 수 없었습니다. 진사進士 한영익韓永益이 주문모를 만난 후, 그의 입국 사실과 입국 경위를 이벽李檗의 동생안 군관 이격李格에게 밀고密告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즉각 주문모 신부와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킨 자를 체포하라는 왕명이 내려졌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박해를 피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신자들의 집에서 유숙留宿하는 동안 포졸들은 그가 묵고 있는 곳을 찾아내려고 방방곡곡을 수색했습니다. 그를 숨겨 주었던 신자들은 밀고하지 않았지만, 대신 고문을 당하고 순교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주문모 신부는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한양으로 돌아와 의금부에 가서 자수합니다. 자신을 위해 죽어 간 신자들을 외면할 수 없고, 더 이상 자신을 위해 그들이 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자수는 왕실에도 알려졌기에 여러 차례 회의했습니다. 중국인이기 때문에 중국으로 보내어 국제조약대로 황제의 손에 그 운명을 맡겨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들이 박해하던 천주교의 두목을 놓아줄 수는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결국 주문모 신부는 순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에 황사영 알렉시오는 주문모 신부를 만났고 세례를 받고 백서帛書를 씁니다.

 

신유박해의 배경에는 정치적 갈등과 계급 간의 대립,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이 갈등을 이해하는 것은 천주교의 4대 박해를 아우르는 큰 역사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Profile
인천교구 사제. 역사신학을 전공했고, 3년간 보좌 신부 생활을 거쳐, 현재 백령청소년문화의집 관장으로 청소년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청소년들을 품어 줄 수 있는 사제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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