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신다면 해외에 나가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 것도 좋지만, 우리나라에도 갈 만한 좋은 곳들이 많습니다. 특히 자연을 느끼고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싶다면, 그리고 잠깐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싶다면 꼭 가야 하는 곳이 ‘제주도’입니다. 잘 알려진 유명한 관광지이며, 다양한 음식, 아름다운 해변과 경관 덕분에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저도 제주도, 하면 맛집이나 해수욕장 같은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성지순례로 제주도를 다녀오고 나서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성지로 ‘용수 성지’가 있습니다. 이곳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 최초로 중국 상해에서 사제로 서품받고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에서 조선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약 28일간 표류하게 됩니다. 가까스로 용수리 해안에 표착한 김대건 신부와 동료 신자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순례자가 이 성지를 찾고 있습니다.
제주도의 첫 번째 신자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입니다. 그는 제주도 조천읍 함덕리 출신으로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1857년 2월 18일, 그는 풍랑을 만나 중국 광동 해안까지 표류했습니다. 다행히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었고, 그 후 홍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조선인 신학생이었던 이 바울리노를 만나 교리를 배웁니다. 김기량은 세례를 받아 제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신자가 되었고, 제주도를 복음화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다가 1867년 1월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때 순교합니다. 이를 기리고자 함덕중학교 서쪽 도로변에 순교 현양비가 세워졌으며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뒤에 가려진 제주도는 조선 시대 중죄인을 유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중 추자도는 제주항에서 배를 타고 약 45Km 떨어진 섬으로서 상추자, 하추자로 나뉩니다. 그중에서도 하추자도에는 ‘황경한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황경한은 ‘황사영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 알렉시오의 아들입니다.
황사영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후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이었던 경한은 추자도로 가게 됩니다. 부인이었던 정난주 마리아는 두 살 난 어린 아들을 데리고 뱃길에 올랐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호송선에서 두 명의 나졸을 매수하여 어린 황경한이 죄인으로서 살아가지 않도록 하추자도 예초리 황새바위에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황경한은 오씨 성을 가진 어부에게 거두어져 평생을 그곳에서 지냈으며, 아직도 그의 후손들이 추자도에 살고 있습니다. 황경한의 묘소에는 먼 바다를 바라보며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야외 제대가 마련되어 있으며 황새바위 쪽에는 ‘눈물의 십자가’라는 이름의 철제 십자가와 어린 황경한의 모형이 세워져 있습니다.
또한 제주도로 유배 온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가 맞이한 첫 번째 신앙인으로 기록됩니다. 그녀는 제주목 관비官婢의 신분으로 평생을 살았지만, 정약현의 딸로서 학식이 풍부하고 교양을 갖추고 있어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습니다. 노비였으나 굳건하고 깊은 신앙을 가졌던 그녀는 ‘한양 할머니’라고 불리며 이웃들에게 사랑받았다고 합니다. 37년간 노비 생활을 하던 그녀는 1838년 세상을 떠나 모슬포 뒷산에 묻혔습니다. 제주교구는 그녀를 ‘백색 순교자’로 기리기 위해 ‘대정 성지’를 조성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주도에서는 천주교인들에게 큰 사건인 ‘신축교안’이 일어납니다.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면서 박해는 완화되었으나. 유학적인 전통이나 관습이 남아 있던 지방에서는 여전히 신자와 민간인 간의 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1901년에 제주도에서 일어난 신축교안辛丑敎案은 대규모 민란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 사건은 어느 한쪽만 잘못이 있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당시 제주도에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도록 중앙 왕실에서 파견된 ‘봉세관’들의 횡포로 도민 전체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 와중 1899년, 프랑스 선교사가 파견되어 천주교는 화전민, 향리층, 유배인들을 중심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선교사의 치외법권, 즉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불리함을 해소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토착 세력을 밀어내고자 봉세관들이 일부 교우들을 징세 담당자로 기용했습니다. 또한 몰래 제주도에 들어온 일본 밀어업자들이 천주교와 대립하던 상무사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선동하여 갈등이 심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착문화를 무시하고 신목을 베어 버리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는 신자들이 생겨났고, 모든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성난 민심은 천주교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민군으로 변한 군중들은 천주교 교인들을 학살하였고, 천주교회가 있던 제주읍성을 함락합니다. 특히 170여 명의 신자들이 매를 맞고 처형된 장소가 바로 제주 시내에 있는 ‘관덕정 순교터’입니다.
신축교안 이후 1902년 제주를 방문한 뮈텔 주교는 희생된 무연고 시신들의 매장지를 확보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조정에서는 묘지 부지로 ‘황사평’을 내어줍니다. 이 장소는 현재 약 18,000평의 부지로 제주교구의 공동 안장지로 사용되며 ‘황사평 성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지막 소개할 장소는 ‘새미 은총의 동산’입니다. 이곳은 역사적인 장소라기보다는 기도와 묵상의 공간으로, 신자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기도할 곳이 있기를 바라는 제주 교구 사제들의 뜻에 따라 성 이시돌 목장을 세운 임피제 신부가 목장 뒤편을 순례지로 개발하면서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세 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못이라는 의미의 삼뫼못 묵주기도 호수를 중심으로 개발되었고, 2009년에는 ‘새미 은총의 동산’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명명되었습니다.
‘새미’는 영문으로 SAEMI로 표기하는데, 이는 Sanctus(거룩한), Anima(영혼), Evangelium(복음), Mediator(중개자), Imago Dei(하느님의 모상)의 앞 글자를 따온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은총과 순례객의 기도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이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2009년 5월 15일 제주교구에서는 이 새미 은총의 동산에 ‘예수님의 탄생’부터 ‘최후의 만찬’까지 예수님의 공생활 중 큰 사건 12개를 테마로 하여 예수님 생애 공원을 조성했습니다. 사람의 실제 크기와 비슷한 동상으로 꾸며 놓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 기도하다 보면 눈앞에서 예수님의 일대기가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박해 때문에 생이별하여 평생을 살았던 정난주 마리아와 황경한 모자의 이야기와 제주도의 첫 신자 김기량, 김대건 신부와 인연이 깊은 용수 성지, 오해로 발생한 신축교안과 관련 있는 황사평 성지와 관덕정 순교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미 은총의 동산까지 살펴보면서 제주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더 넓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제주도를 휴양지가 아니라 우리 신앙 선조들이 삶을 치열하게 살았던 장소로 여기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