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 성지, 신앙과 희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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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 성지, 신앙과 희생의 역사

신앙 선조들의 굳은 신앙심을 되새기며

2024.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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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수많은 교회 지도자가 체포됩니다.

황사영의 이름은 이들을 추국하는 과정에서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황사영은 서울 서부 아현방(현재 서울 마포구 아현동 일대)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8세가 될 때까지 증조부 황준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으며 자랍니다. 정조 14년(1790년), 황사영은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합니다. 정조는 그를 따로 불러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가 어린 나이임에도 학문적인 성취를 이룬 엘리트였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황사영은 정약용의 당이모(5촌 이모)의 외손자인 동시에 조카사위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정약현과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난주와 결혼한 직후인 1790년경에 천주교에 입교하게 됩니다. 입교한 후, 황사영은 최인길의 집에서 처음 주문모 신부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이후 그는 교리를 연구하고 신앙을 전파하는 명도회明道會의 구성원이 되어 활발하게 교회 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던 황사영은 체포령이 내려지자 2월 10일 저녁 강완숙의 소개로 용호영龍虎營 안에 있는 김연이의 집으로 피신합니다. 그곳에서 의금부 도사都事의 수색 소식을 듣고 권상술權相述의 집을 거쳐 송재기의 집으로 갑니다. 이때 김의호를 만나 그의 제안대로 상복으로 변복하고 여주, 원주를 거쳐 2월 그믐께 배론의 팔송점八松亭 도점촌陶店村에 있는 김귀동의 집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황사영은 자신의 은신처를 만들기 위해 토굴을 팝니다. 토굴에 숨어 가명을 쓰면서까지 조용히 숨어 지내던 황사영 알렉시오는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결심을 합니다. 이때 그가 쓴 글이 ‘황사영 백서’입니다.

 

백서는 박해의 경과와 교회 재건에 대한 황사영의 의견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고 작성되었습니다. 교회의 밀사密使가 옷 안에 넣고 꿰매어 감시를 피할 수 있도록 명주 천에 작성되었다고 합니다. 내용은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뉘며, 본론은 총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신유박해의 시작과 그 과정에 대해 설명합니다. 둘째, 주문모 신부와 순교자들에 대해 간단하게 서술합니다. 마지막 셋째, 교회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세 번째 내용,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에 주목해야 합니다.

 

황사영은 전교가 효과적이지 못한 이유가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이며, 북경교회와의 연락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선교사들이 더 수월하게 선교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서양 선박의 영입을 원했습니다. 서양 선박의 영입, 이른바 대박청래大舶請來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할 수 있다면 군함 수백 척과 정병 5, 6만 명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글을 잘하고 사리에도 밝은 중국 선비 3, 4명을 데리고 곧바로 해안에 이르러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어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입니다. 여자와 재물을 탐내어 온 것이 아니고 교황의 명령을 받고 이 지역 산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온 것입니다. 귀국에서 한 사람의 전교하는 선비를 기꺼이 받아들이신다면 우리는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도 없고, 절대로 대포 한 방이나 화살 하나도 쏘지 않으며 티끌 하나 풀 한 포기 건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는 북 치고 춤추며 떠나갈 것입니다.

 

황사영의 행위는 겉으로는 선한 의도로 보였지만, 집권층에게는 외국의 세력을 이용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결과 그는 매국노賣國奴로 낙인찍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숨어 지내던 토굴은 현재 ‘배론 성지’로 조성되었습니다. 비록 당시의 토굴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는 않지만, 역사적 내용을 살펴본 뒤에 다시 그 장소를 방문한다면 황사영의 신앙과 우여곡절, 자유의 간절함을 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성지에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서품된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땀의 순교자’로 알려진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하루에 80리에서 100리(약 30~39km)가량의 거리를 걸어 다녔으며 성직자 양성, 순교자 자료 수집 등을 수행하다가 과로로 선종하였습니다. 그의 묘소는 배론 신학교 뒷산 언덕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는 잘 알려져 있기에 ‘배론 신학교’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고자 합니다. 배론 신학교는 1855년 프랑스 선교사였던 메스트로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교우촌 회장이었던 장주기 요셉이 자신의 집을 신학당으로 봉헌하면서 시작된 신학교는 방인 사제 양성(현지인 사제 양성)을 목표했습니다. 라틴어, 한글, 한문, 수사학, 천문학, 음악, 지리, 역사, 자연과학 등 일반교양 과목과 철학, 신학과 같이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병인박해로 인해 장주기 요셉과 관련 신부들이 처형될 때까지 약 11년간 운영되었는데, 안타깝게 단 한 명의 사제도 탄생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배론 신학교는 한국 최초의 정주형定住形 신학교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사제 양성을 위한 모든 교육과정, 당시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로 나누어 부르던 모든 과정을 통합한 학교였기에 교육기관으로 따지면 중등 교육과 대학 교육이 합쳐진 새로운 최초의 근대신학 교육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배론 성지는 이처럼 4대 박해의 시작을 알리는 황사영 백서 사건과 신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소

그리고 병인박해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힘썼던 배론 신학교까지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시기의 사건들이 얽힌 교우촌입니다.

이에 힘입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성지로 거듭난 이곳을 찾아 장소마다 얽힌 이야기,

신앙 선조들의 굳은 신앙심을 되새기며 순례하시길 바랍니다.

Profile
인천교구 사제. 역사신학을 전공했고, 3년간 보좌 신부 생활을 거쳐, 현재 백령청소년문화의집 관장으로 청소년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청소년들을 품어 줄 수 있는 사제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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