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 우리 성인, 용감한 승리자시여…….”
성당에서 이런 성가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1년 열두 달 중 9월 한 달은 ‘순교자 성월’, 우리나라 순교자들을 기리는 시기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신앙이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 낸 정수精髓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님이신 김대건 안드레아와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처럼 잘 알려진 순교자들의 일대기를 통해 순교자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교회에서 성인품에 오르신 분이 103명이며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하여 124위의 순교 복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순교자들은 정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주변의 성지와 그 성지에 관련된 순교자들을 알아보고 그분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기억해 보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로 인천교구 성지 중에서 강화 지역 순교 성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요즘 강화도는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 명소입니다. 수도권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좋고, 다양한 특산품과 먹거리 덕분에 주말이면 차량이 붐비기 일쑤입니다. 또한 ‘강화지석묘’라는 고인돌이 발견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까우면서도 볼거리가 많은 강화도에 방문하려면 강화대교를 지나야 하는데, 강화도에 들어오자마자 우리를 맞이하는 성지가 바로 ‘갑곶 순교 성지’입니다.
1871년 미국이 군함을 앞세워 강화도 해역을 침범했던 사건, 신미양요辛未洋擾를 들어 봤을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고종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강화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 함대를 왕래하다 붙잡힌 사람들이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입니다. 이들이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효수당한 곳이 지금의 갑곶 순교 성지입니다. 애석하게도 이들의 세례명이나 후손들의 증언들은 남아 있지 않지만, 종교의 자유를 향한 그들의 열망은 후대에 이르러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인천교구에서 그들을 기리며 ‘갑곶 순교 성지’를 조성했기 때문입니다.
이 갑곶 순교 성지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분이 또 있습니다. 많은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고 인천교구 발전의 초석이 된 박순집 베드로(1830~1911년) 증거자입니다. 이분의 유해가 갑곶 순교 성지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박순집 베드로는 조선대목구 제2대 교구장이었던 앵베르 라우렌시오(1796-1839년) 주교의 심부름꾼으로 활동하며 거침없이 신앙을 이어 나간 인물입니다. 1890년 제물포로 이사하여 답동본당의 초대 주임이었던 빌렘 신부의 사목을 도우며 일생을 하느님을 위해 살았지요. 이러한 신앙 열성은 가족들에게도 이어졌습니다.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박해받아 순교한 박순집의 형 요한의 아들 박 바오로, 고모 박 막달레나, 부친 박 바오로를 비롯한 16위의 순교자가 있지요. 이러한 순교자, 증거자를 모시고 있는 갑곶성지는 생각보다 규모가 큽니다. 피정 센터와 성당 옆에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어, 잠시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신앙 쉼터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갑곶 순교 성지를 지나 강화읍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만나는 성당이 강화성당입니다. 쉽게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세워졌던 고려 궁지 밑의 강화성당 교육관 옆에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고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진무영 성지
지금 진무영鎭撫營 성지는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쉽게 지나칠 정도로 작은 제대와 십자가로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1700년(숙종 26년)에는 해상 방어를 위해 설치된 군영軍營이었지요. 이 장소는 주둔지의 역할을 해 왔지만, 박해가 시작된 후 천주교 교인들을 처형하는 장소였습니다. 수많은 신자가 이곳에서 순교했습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순교자는 장치선張致善, 최영준崔英俊 등이 있습니다.
장치선(1830-1868년)은 일찍부터 조선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신부 12명 모두를 만나러 다닐 정도로 열성적인 신자였습니다. 천주교 4대 박해 중 가장 많은 신자가 순교했던 병인박해(1866년)가 시작되자 리델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1년 뒤 귀국했습니다. 그 이후 조선에 들어올 신부를 맞이할 방법을 찾다가 체포되어 순교했습니다.
최영준(1811-1868년)은 경기도 용인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앵베르 주교에게 세례(세례명 요한)를 받았으며, 서울 아현동에서 회장직을 맡아 선교사들은 물론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긴밀히 지냈습니다. 또한 중국 교회와 연락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습니다. 그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의 물길 안내인을 맡았다는 이유로 박순집 베드로의 형과 함께 진무영에서 순교했습니다.
강화도 초입의 두 성지를 지나 강화도 안쪽으로 오면 ‘일만 위 순교자 현양 동산’이라는 성지가 있습니다. 보통은 ‘성지’라는 단어가 이름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갈 텐데, 이곳은 특이합니다. 이 성지가 무명無名 순교자를 기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이름 없는 순교자, 이름을 남기지 않고 오로지 신앙을 위해 순교한 이들을 위한 성지입니다.
1800년대에는 4번의 큰 박해와 여러 지방에서 이루어진 박해로 적게는 1만 명, 많게는 3만 명이 순교했습니다. 그중 이름이 알려진 이는 103위 순교 성인과 124위 복자뿐입니다. 하지만 이름이나 행적을 모른다고 해서 순교자의 신앙과 정신까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이 일만 위 순교자 현양 동산에는 남종삼 요한(1817-1866)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남종삼 성인은 관직에 있으면서 승정원 승지까지 지냈던 고위 관료였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강화되고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결국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습니다. 이후 성인의 유해는 보다 많은 교우가 성인을 친견할 수 있도록 인천교구에 기증되었다고 합니다.
인천교구는 1996년부터 성지 조성 사업을 시작해 2002년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의 주례로 ‘일만 위 순교자 현양 동산’이라는 이름의 성지가 모든 무명 순교자에게 봉헌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안다면, 성지에 방문했을 때 순교자들의 신앙과 정신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