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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책: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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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함께 머무는 시간] 마음독립서점의 김태임 마르타가 전하는 한 권의 책을 만나 보세요!
북클럽에서 만난 질문
한 달에 한 번, 와인과 함께 소설 북클럽을 열고 있다. 이번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 과연 대문호 톨스토이답게 문장은 조금의 틈도 없이 명확하게 한 지점을 날카롭게 찌르고, 표현은 적나라했다. 어떤 미화도 포장도 없이. 마치 내 시커먼 속을 들킨 것 같았다. 모임에서 소개된 얀 마텔의 《101통의 문학편지》의 한 문장처럼.
“누군가 우리를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등장인물처럼 바라본다는 걸 깨닫는 날, 우리 눈에도 이반 일리치의 잘못들이 너무나 명확해서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등장인물 모두 내 모습처럼 느껴졌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꼭꼭 숨겨 두고 적당한 가면을 바꿔 쓰며 아닌 척 살아가고 있지만, 하느님과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얄팍한 꼼수와 이기적인 마음, 치졸한 선택, 이불 킥이 절로 나오는 말과 행동을. 톨스토이는 참 무자비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조금은 좋은 면도 있다고 두둔해 줄 법도 한데. 야속할 정도로 모든 인물의 그 쪼잔함이, 찌질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
이반 일리치는 성공적인 법관이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그는 사회 규범에 맞춰 살았고, 적당히 즐길 줄도 알았으며,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병이 찾아오자, 그의 세계는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병상에 누운 그는 차갑고 무심한 가족과 지인들 사이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묻는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과연 옳았는가?’라는 질문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절박해진다. 생의 마지막에는 극도로 외로웠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지만 진정한 관계는 없었다. 딱히 잘못 산 것도 아니었는데, 병들고 죽음을 앞에 두고 나니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는 죽어가면서야 깨달았다. ‘아, 내가 정말 중요한 걸 놓쳤구나.’ 안타깝게도 그 깨달음은 너무 늦어 버렸다.
죽음 앞에서 삶을 다시 되돌아보는 일, 그것은 성찰이었다. 나와 나의 삶을 다시 살펴보는 것. 만약 이반 일리치가 성찰할 여유를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 감사한 이유 중 하나는 묵상과 성찰을 하도록 시스템이 아주 견고히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전례와 성사 안에서. (비록 발바닥, 혓바닥 신자일지라도 말이다.) 자연스럽게 성찰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마련된 것. 그리고 그동안 가정 기도에서 나누었던 일련의 과정을 떠올렸다.
“와, 가정 기도를 해요? 신기하다. 어떻게 하는 거예요?”
북클럽에서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가정 기도 이야기를 했더니 북클럽 멤버들이 보인 반응이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은 어떻게 그런 걸 시작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가족들이 다 좋아하는지 등을 물었다.
가정 기도
가정 기도를 처음 시작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나였다. 2017년의 일이다. 기도를 열심히 해서도, 신앙심이 깊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부모님이 평소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신앙 안에서 어떤 마음이 드시는지가 궁금했다. 사실 우리 세 자매는 떨어져 있어도 전화로 몇 시간씩 이야기하거나, 한때는 줌으로 만나 매일 새벽 모닝페이지를 함께 쓰기도 하는, 좀 유별난 자매들이다. 비록 몸은 멀어졌어도 심리적 거리감은 오히려 더 가까워진 것 같은데, 부모님과는 그게 쉽지 않았다. 세 딸 중에 유머와 이벤트를 담당하는 큰딸인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무심히 툭 “가정 기도 한번 해 볼까?” 하고 제안하면 그뿐이었다.
어색했던 시작
기도 묵상 노트에는 처음 가정 기도를 시작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막상 기도하려고 얼굴을 마주하니 왜 이리 어색한지.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성당에서 봉사할 때는 전혀 스스럼이 없던 나였건만 어색하고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두 동생과 부모님 앞에서 봉사자 역할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나눔, 대화가 어려웠다. 그때 알았다. 그동안 우리 가족의 대화가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를.
일단 시작했으니 어떻게든 밀고 나가 보자는 마음으로, 눈 질끈 감고 ‘나는 봉사자다’라고 자기 최면을 걸며 기도를 진행했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부모님. 자식들 앞에서 내밀한 마음을 내어놓기란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거기에다 한술 더 떠서 말씀을 삶에 비추어 본다는 것도 낯선 작업이었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무언가를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의 어려움도 짐작이 갔다. 늘 우리에게 좋은 것, 모범적인 것만 보여 주고 싶으셨을 부모 마음을 어찌 모를까. 그렇지만 아쉬웠다. 수박 겉핥기식 피상적 기도가 아니라 빨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박 알맹이를, 진짜 삶이 뚝뚝 떨어지는 기도를 함께하고 싶었다.
기도의 여정
그렇게 드문드문 이어오던 가정 기도를 2024년에 다시 마음먹고 한 달에 한 번 모이기로 했다. 우리는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7년간의 가정 기도 안에서, 주님 말씀이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단련시키셨나 보다. 우선 엄마가 달라지셨다. 그것도 극적으로. 엄마는 “나는 잘 모르겠어.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 하느님 뜻을 잘 모르겠다.”라며 나눔을 시작하셨다. “난 요즘 (성당을) 좀 쉬고 있어. 하느님한테 대들기도 하고.” 이런 솔직함이라니! 엄마의 담백한 고백이 반가웠다.
엄마의 냉담이 반가운 게 아니라 그 솔직함이 반가웠던 것이다. 온 가족이 냉담하던 때 홀로 가족을 위해 오랜 시간 기도해 온 엄마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희생하고 봉사했으며 공부도 참 열심히 했던 엄마.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아서 더는 궁금한 것도 없고, 알고 싶은 것도 없는, 그래서 피상적인 나눔에 머물렀던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새로 태어나서 진짜 아이가 된 것처럼 모르겠다고, 하느님한테 좀 따지고 싶다고 떼쓰는 솔직한 이야기가 진짜 기도 같았다. 엄마가 궁금해하는 하느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청한다면 언젠가 응답해 주실 거란 믿음이 있다.
아빠는 교장 선생님 훈화 스타일에서 벗어나 점점 더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에게 들려주신 적 없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퇴임 후 점점 나이 들면서 느끼는 감정을 나누기 시작하셨다. 완벽한 부모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잠자리 들어서 갑자기 외로움을 느끼고 뭔가 허전해. 그러다가도 이렇게 네 모녀가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굉장히 포근해지고 보기 좋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요즘 미사 다녀오면서 아름다운 가게에 들러서 인형을 사 모으는 것(요즘 아빠의 취미 중 하나)도, 그 인형들을 보면서 우리 손주들 모습을 떠올리는데 그 순간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나의 보물은 우리 가족이다. 엄마는 가끔 웬수 같지만(그러면서 엄마 눈치 살짝 보시고), ‘엄마는 보물이다’ 생각하면서 살련다. 사랑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
부모님이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나시더라도 서로에게 후회가 남지 않도록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은 가정 기도를 통해 받는 가장 큰 선물이리라. 죽음 앞에서 외롭지 않은 삶, 사랑 주고 사랑받았다는 확신 속에서 편안히 마무리할 수 있는 삶. 이반 일리치가 그토록 원했던 바로 그것.
어디선가 듣기로, 신부님들은 새해 첫날이면 새로 유서를 쓰신다고 한다. 우리도 가정 기도 할 때 한 번 써 보자 했다. 나의 죽음, 가족의 죽음을 미리 떠올리는 작업은 그 자체로 의미 있었다. 아빠가 원하는 죽음, 엄마가 원하는 죽음의 모습은 달랐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도 있었다. 적어도 이렇게 서로의 생각을 나눈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앞으로 후회 없이 더 많이 나누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고 말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이다. 그는 죽음 앞에서 깨달았지만, 우리는 살아 있는 지금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 성취나 외적인 성공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서로의 연약함까지 받아안는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다. 가정 기도는 그런 삶을 위한 작은 시작이었다.
가족이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그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기도 시작과 마침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함께 부르는 성가와 돌아가며 한 절씩 나누는 말씀이 얼마나 귀한지.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살아 있는 동안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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