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9시, 잘 준비를 마친 아이들과 기도한다. 기도 내용은 매일 비슷하다.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잠자리에 들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린 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어떤 날은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을 위해, 어떤 날은 저녁 뉴스에서 본 사고 희생자를 위해, 어떤 날은 점점 뜨거워지는 공동의 집을 위해 기도한다. 찧고 까부는 삼형제도 이 순간만큼은 장난을 멈춘다. 기도를 마친 아이들은 종종 묻곤 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엄마?”
매일 감사 기도를 바칠 만큼 좋은 걸 주시는 하느님께서 왜 나쁜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시는 거냐고 해명을 요구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하루는 본당 신부님에게 물어봤다. 왜 고통이 존재하나요. 진부한 질문이라고 면박을 주긴커녕 사뭇 진지하게 고민하던 신부님은 고통의 존재 이유가 곧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알쏭달쏭한 대답을 내놓았다. 신부님 대답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말해 줄 속셈이었던 나는 다소 실망했지만 신부님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왜?’라는 질문에 이어지는 태도로 합당한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을 간직하고서도 계속 믿는 것이며 은총과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고통의 의미를 조금씩 발견하는 것이 최선의 대답일 것이다.
글쓰기,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
고통의 의미를 조금씩 발견하는 작업이 바로 글쓰기다.
아파하는 누군가(당연히 ‘나’도 포함한다)를 모른 척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가 겪는 고통의 형태와 정도를 상세히 헤아리기 위해 글을 쓴다. 쓰는 사람은 반드시 읽기 마련인데 책이나 기사를 읽으면서 세상에 존재하나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갖가지 형태의 고통을 알게 된다. 따라서 글은 고통을 건져 올리는 낚싯대이자 고통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그물망인 셈이다.
고통에 눈이 밝아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다름 아닌 ‘저울질’이다.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비교하는 것이다. 흔히 저울질을 계산적 행동으로 여기지만 고통을 저울질하는 것은 세상의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몸짓에 가깝다. 저 사람이 겪는 고통에 비해 내 쪽의 고통이 가볍다는 걸 알고 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타인이 짊어진 고통과 무게를 맞추기 위해 기꺼이 고단함을 무릅쓰는 것이다. 크레인 조종석에서 500일 넘게 고공 농성하는 노동자가 안타까워 지상에서 뭐라든 하면서 연대하는 것, 비장애인이 지하철 승강장에서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도 그런 저울질의 결과다.
의정부교구 문화홍보국에서 주최한 신앙 글쓰기 모임 ‘함께 쓰는 기쁨’을 진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유독 고통에 눈이 밝았다. 수강생들은 자신이 안고 있는 고통을 볼 줄 알았고 자기 밖에 있는 고통을 발견하곤 했다. 때론 자기 쪽으로, 때론 다른 사람 쪽으로 기울어지는 저울을 느끼며 괴로워했다.
“글 쓰는 건 너무 어려워요. 할수록 어렵고 힘들어요.”
울상 짓는 수강생들 앞에서 ‘함께 쓰는 기쁨’이란 명칭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물론 나도 글 쓰는 게 어렵다. 한 번도 쉬운 적이 없다. 글을 쓰는 것, 그러니까 알맞은 단어를 적재적소에 배열하거나 문장을 논리적으로 엮는 작업이 어려운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에 앞서 일단 고통에 맞닥뜨려야 하기에 괴롭다. 쓰지 않을 땐 있는지조차 몰랐던 문제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며 곧 거대한 빙산처럼 크게 보이고, 이내 쓰는 사람을 압도하고 만다.
나는 가톨릭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프로그램 몇 개의 구성을 담당하는데, 내가 쓰는 오프닝 내용을 한마디로 하면 ‘잘 살자’는 거다. 제철 행복을 놓치지 않고 희망을 가까이하며 주변을 돌아보는 좋은 사람이 되자는 내용. 써 놓고 보니 참 뻔하기 그지없다. 이 뻔한 말을 십 년 넘게 되풀이하지만 체득하는 건 아직도 먼일이라, 라디오 원고를 쓸 때마다 입만 살았다는 건 이런 걸까 생각하곤 한다.
내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괴로운 것은 따로 있다. 라디오 오프닝에 적합한, 이른바 ‘안전하고 착한 말’을 늘어놓다 보면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착하게만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능소화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게 아니라, 이 사회에는 외로운 투쟁을 하느라 능소화를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닐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그램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서’는 핑계고, 단지 나에게 말할 용기가 없는 게 아닐까. 나는 언제까지 모니터 안을 헤매고 있을 것인가. 내게 원고를 쓰는 일이란 용기도 배짱도 없는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함께 쓰는 기쁨’에서 만난 분들에겐 자신을 괴롭게 하는 그 주제를 끝까지 파고들어 가 보길 청했다. 파다가 멈추면 글 쓰는 게 괴로움으로 남을 것이나 용기를 내어 더 나아가고, 기어코 가장 깊은 데에 다다르면 괴로움이 아닌 다른 감정을 마주할 수 있을 거라고. 나부터가 그런 경험이 미천한 까닭에 끝까지 파고들도록 밀어주고 끌어 주진 못하고 말만 번지르르 늘어놓았다. 과연 그분들은 어디까지 도달하셨을까.
글 쓰는 기쁨을 알고자 들어왔다가 고통과 괴로움만 잔뜩 알게 되는 글쓰기 모임 ‘함께 쓰는 기쁨’은 매주 수요일, 여섯 번 만나 다섯 편의 글을 썼다. 만나서 글을 쓸 때마다 이번 글은 도저히 못 쓰겠다고 말하는 분이 반드시 한 분 이상 있었으나 결국엔 모두 완성했다. 모임 시간 내에 다 쓰지 못하면 집에 가서 마무리하고 온라인 공간에 올렸다. ‘후련하네요.’라는 말과 함께. 그 쾌감을 나도 안다. 식도에 걸려 있던 굵은 알약이 비로소 쑥 빠지는 느낌. 흐릿하던 것이 갑자기 선명하게 보이는 느낌. 힘들어도 계속 쓰게 하는 힘이 거기 있다.
떠다니는 단어를 붙잡기 위한 안간힘
공부는 세상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이란 글귀를 본 적 있다. 공부 대신 글쓰기를 넣어 본다. 알 만큼 다 안다고 쉽사리 말하지 않고, 자세히 보기 싫어서 흐린 눈 하지 않고 세상에 어떤 기쁨과 슬픔이 존재하는지 분명하게 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게 글쓰기다. 그 과정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 안경을 썼더니 전에 안 보이던 먼지가 잘 보여서 청소를 더 자주 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부지런히 먼지를 닦아 내듯 생각을 정리하고 단어를 다듬다 보면 내 안에 꼬이고 막힌 심사가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고, 그게 하나둘 풀리면서 글이 생겨난다. 그렇게 생겨난 글은 전통적인 작문법을 따랐든 아니든 상관없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자체로 역사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세상과 화해하는 역사.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뭔가를 주고자 하시지만 우리의 손이 가득 차 있어 받지 못한다.”
고통은 대부분,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겪는 감정이다. 뭔가를 잃은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이 채워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를 얻게 되리라. 그 자유를 경험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경험한 것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전하는 시도가 성공하든 아니든, 계속 노력해야 하고 그게 우리가 개별적인 존재로 창조된 이유일 것이다.
단 몇 줄이어도, 무슨 내용이라도 좋으니 글을 써 보자. 머릿속에 희미한 형태로 떠다니는 단어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보자. 안간힘을 다하는 존재가 이토록 많다는 사실을, 저마다의 안간힘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음을 발견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