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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기도’는 익숙한 만큼 그 깊은 의미를 놓치기 쉬운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첫마디부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청원까지, 짧은 기도 안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이 담겨 있습니다. |
마태오 복음서는 다른 복음에 비해 ‘아버지’라는 표현을 특히 자주 사용하는데, 예수님의 아버지로 25회, 사람들의 아버지, 곧 우리 아버지로 21회 사용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 아버지로 표현되는 21회 가운데 16회가 산상 설교에 나오며, 그 가운데서도 10회가 마태오 복음서 6장 1-18절에 나온다는 점이다.
마태오 복음서의 이 대목은 아버지의 자녀들이 행해야 할 올바른 태도, 곧 올바른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다루는데,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그분 마음에 드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 준다. 그것은 사람들이 모르게 오직 하느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숨어 계신 듯 보이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즉,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세상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라, 언제나 아버지로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런 믿음이 없는 이들은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처럼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하는 위선자의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다. 눈앞의 보상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특별한 은총
유다인들도 장엄한 전례 기도나 집단적 신앙 고백문 등에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 또는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기도 중에, 혹은 대화 중에 수시로 서슴없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서슴없이 ‘아바’(אַבָּא abba)라고 부르신다. 이는 아람어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런 점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격적으로 우리를 보살피시는 따뜻한 아버지이심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호칭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했으며, 바오로 사도와 그가 세운 여러 교회의 신자들도 하느님을 감히 ‘아빠’라고 불렀다(로마 8,15; 갈라 4,6 참조).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을 거룩한 아버지로 섬기며, 그분께 의탁하고 기도하며 대화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라는 말에 담긴 사랑
주님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른다. 이는 주님의 기도가 개인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위한 기도라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그래서일까?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부르실 때 항상 ‘너희 아버지’라고 표현하신다(마태 5,16; 6,8; 7,11 등 참조). 또한 ‘우리’라는 표현 속에는 우리가 모두 같은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자매라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나만을 위한 청보다 우리 모두를 위한 청을 바치는 것이 언제나 옳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기도는 우리 각자의 바람을 청하는 기도라기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 곧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내 뜻보다 먼저, 아버지의 뜻을 청하는 기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신다. 그러기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이다.
물론 지금은 하느님께서 숨어 계시는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해야 한다. 지금도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이어지는 두 번째 글은 다음 주에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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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읽는 ‘주님의 기도’
<주님의 기도, 다시 읽다>는 익숙한 말씀 속에 담긴 예수님의 깊은 뜻을 묵상하는 연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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