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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 일상이 된 시대, 우리는 왜 점술 같은 미신에 마음을 맡길까요?
오늘의 글은 점술 열풍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참된 의미를 다시 묻습니다. 이제는 미신이 아닌 ‘신앙’에 마음을 맡기며,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요?✟ |
불안으로 흔들리는 일상, 점술을 찾아 나선 사람들
경기 침체, 정국 불안, 기후 위기, 대형 참사 등 일상이 위협받는 일이 다반사가 되면서, 요즘 우리 주변에는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려는 움직임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양한 형태의 예방책에 의존하는 경향이 확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개인의 운세나 국가의 장래를 용하게 맞춘다는 이른바 ‘예언’이,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점복(占卜)’이 성행하는 것이다. 때마침 연말연시인지라 시중에 성업 중인 소위 ‘철학관’이나 점집에는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운세를 알아보려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젊은이들을 주 고객으로 하는 ‘타로’ 등의 외래 점술(占術)도 광범위하게 유포되는 실정이다. 몇몇 이름난 곳은 몇 달 치부터 몇 년 치까지 예약되어 있다고도 한다. 또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도 그날의 운세나 궁합, 사주, 토정비결 등 역술(曆術) 코너를 설치·운영하고 있으며, 이러한 콘텐츠를 이용하는 사용자도 크게 늘고 있다. 심지어 어느 백화점에서는 개장 기념행사로 일정액 이상을 구매한 고객들에게 무료로 사주를 풀어 주는 자리를 마련하여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불안을 키우는 것은 과연 점술인가, 언론인가?
시중의 이목을 끄는 이름난 무당의 경우에는 개인사의 길흉화복이라는 범주를 넘어,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 전반에 걸친 점괘를 담은 책을 내놓기도 하였다. 정치가, 기업인, 정부 관리들까지 덩달아서 그런 종류의 저술을 읽거나 기업경영이나 국가 정책에 참고하면서 조바심을 낸다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언론 매체는 이와 같은 상황을 비판하고 잘못된 대처 방식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앞다투어 국내의 점술들뿐만 아니라, 논란이 되어 온 해외의 운명론과 예언들까지도 충격적이게 과대 포장하여 자극적으로 소개하는 실정이다.
무당들조차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민간신앙이나 민중 종교의 현장 연구를 하다 보면, 신점(神占)을 다루는 무당 자신들마저도 자신의 영력(靈力)만을 과시하며, 사람을 맹목적인 불안에 떨게 하는 경우를 성숙하지 못한 선무당으로 여긴다. 그러나 정통 법식을 제대로 배운 큰무당은 인격적으로도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예견한다고 여기는 불행한 일들에 대하여 해결할 대안이 없는 한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고 한다.
덧붙여서 체념적인 운명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모두 무당이나 샤머니즘의 고유 영역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점복은 사실 무당의 다양한 기능 중 일부일 뿐이다. 즉,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의 원인을 밝혀 내고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첫 단계에 해당하는 셈이다. 또한 점복의 종류에는 무당의 신점(神占)뿐만 아니라, 역수(易數)의 해설, 풍수지리, 참위(讖緯) 등이 있어 저마다 그 방법이 다르다.
‘변동불거(變動不居)’의 시대, 불안을 정당화할 것인가?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지의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미래의 일을 추측하거나 예단하는 기술을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시도하였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러한 점술의 발생 원인이 되는, 불안감을 일으키는 변동 사항들이 유난히 많은 사회이다. 사회 자체가 급변하는 데다가 확고한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며, 예측을 불허하는 사건들이 정치, 경제, 사회, 환경 전반에 걸쳐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다사다난했던 2025년을 특징짓는 사자성어로, ‘변화와 움직임이 지속되어 머무르지 못한다’는 뜻의 ‘변동불거(變動不居)’가 대학교수들에게 채택될 정도이니 말이다. 이러한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해할 만하다고 하여 그러한 삶의 자세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어느 유명 기업인처럼 신입 사원 선발이나 신축 사옥 선정에 풍수사를 동원하고, 선무당의 허황한 말에 투자 계획을 철회한다면 이는 분명 심각한 문제이다.
의존 대신 ‘선택’을, 회피 대신 ‘책임’을
이러한 행태는 문제의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대처와 해결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사회적 혼란에 대한 지성적인 대응을 회피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자신이나 세상의 미래에 대하여 알고 싶은 심정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호기심이겠으나, 그것 또한 정도의 문제이다. 미래사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거나 그것을 알아보려고 많은 재물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일에 시간과 재물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비합리와 몰이성의 미신과 각종 허황한 점술에 함몰될 것인가, 아니면 탄력 있는 대응을 준비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불안’으로 정해진 미래인가, ‘희망’으로 열린 미래인가?
물론 그리스도교의 성경에도 여러 예언서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횡행하는 이른바 점술로서의 ‘예언’과는 엄연히 구별된다. 미신적인 점복과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말하는 점술은 심약한 사람들을 위협하며, 그들이 불안을 느끼고 체념에 빠지게 한다.
그러한 ‘예언’을 하는 점술사들 또한 자신의 환시나 점술에 사로잡혀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여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남달리 본다고 여기는 앞날의 일을 남들에게 기계적으로 알릴 뿐,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반면에 성경의 예언은 분명히 다르다. 그리스도교가 인정하는 예언은 윤리성과 역사성을 내포한 예언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는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말씀으로, 모든 인류에게 희망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언술(言述)이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에 자칫하면 잊기 쉬운 하느님의 뜻을 역사 속에서 상기시키고 증거하는 일이 바로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예언이다. 참된 평화shalom로 가득한 하느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하려는 다짐과 노력이야말로 올바른 예언의 본질이자 요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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