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다시 타오르는 희망

WYD2027

로마에서, 다시 타오르는 희망

‘1004 프로젝트’로 함께하는 청소년들의 믿음 여정

2025.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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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필리핀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나는 용산 성당으로 부임하여 청소년들과 동반하게 되었다. 10년 만에 새롭게 시작한 본당 생활은 나의 부푼 기대와 희망과는 너무나 달랐다. 기대와 달리 첫 중고등부 미사에서 학생들의 밝은 미소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오히려 더 멀어져만 가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날 한국 사회 안에서 청소년들은 불안, 경쟁, 정체성의 혼란, 신앙의 냉담 속에 놓여 있다. 청소년 미사 참석률은 점점 떨어지고 학생들이 주일 미사보다 학원을 우선시하는 모습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과연 오늘의 청소년들에게 신앙은 어떤 의미일까?’

 

본질적인 질문을 다시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지구 청소년 담당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교구에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2025년 희년을 맞이하여 희망의 순례자라는 주제로 청소년과 청년들을 포함하여, 1,000여 명이 함께 로마로 순례를 떠나는 일명 ‘1004 프로젝트를 기획한다는 발표였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아이들을 데리고, 그것도 해외로 순례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는 달리 1지구 청소년들이 무려 20명이나 참가 신청을 했다. 그것도 내가 속한 용산 성당 아이들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심지어 올해 수능을 앞둔 고3 아이들이 무려 5명이나 참가했다. 정말 의외였다. 그리고 궁금했다. ‘이 아이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번 순례를 떠나는 것일까?’

 


 

희년 순례의 꿈과 희망을 품고

 

우리는 꼬박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교구와 지구, 그리고 본당 협업을 통해 철저히 준비한 끝에 725일 로마로 출국했다. 교구에서 미리 구성해 준 그룹에 따라 우리 1지구 청소년들은 6지구 청소년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 그룹은 지도 사제와 수녀님, 선생님들을 포함하여 총 50명을 이루어 로마 희년 순례의 꿈과 희망을 품고 출발했다.

 

나는 신학생 시절 로마로 두 번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그 기간에 유명한 성지는 모두 다녀왔던 터라 솔직히 커다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이들 걱정이 앞섰다. 앞으로의 순례길이 고생길이 될 것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지만, 중도 포기하거나 아파서 돌아가는 아이들이 있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들은 너무나 밝고 매 순간 활기가 넘쳤다. 이 아이들이 진정 내가 본당에서 본 그 우울한 아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들은 한국을 떠나온 자유를 온 마음으로 만끽했다.

 


 

기쁨과 우정으로 하나 된 순간

 

우리의 첫 여정은 베네딕토 성인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수비아코와 몬테카시노 수도원 방문이었다. 로마 본대회를 앞두고 순례 초반과 마지막 일정은 여행사를 통해 순례했기에 버스로 이동하고 호텔에서 묵는 비교적 편안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기다리는 고난의 행군은 로마 입성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우리가 본 대회 동안 머물러야 할 장소는 로마 외곽에 위치한 소도시였다. 로마 전체가 역사의 생생한 발자취가 묻어나는 공간이라면, 우리가 머물게 된 작은 도시는 그저 평범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사는 일상의 터전이었다. 그 안에는 평범한 동네 성당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중 비교적 큰 지구좌 성당에 머물게 되었다.

 

문제는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어제까지 편안히 잠들 수 있었던 호텔 침대는 이제 사치가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강당 바닥에 매트를 깔고, 침낭을 덮고 자야만 했다. 화장실은 강당에 하나뿐이었고, 샤워는 정해진 시간에만 성당에서 떨어진 스포츠 센터에 가서 해야 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누구 하나 불평하거나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난생처음 겪는 이 불편한 상황은 오히려 새롭고 신나는 놀이에 불과했다.

 

여행의 묘미는 뜻밖에 찾아오는 불청객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와 함께 동숙할 이탈리아 각지에서 온 청소년・청년들이 무려 250명이나 되었다. 내심 이방인인 우리 한국 청소년들이 인해전술로 압도되고, 특히 언어적 장벽과 문화 차이로 주눅 들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러한 염려는 금세 잦아들었다. 축구 좀 찰 것 같은 남자아이들은 공 하나로 축구 강국 이탈리아의 아이들과 좁은 마당에서 금세 우정을 나누었다. 여자아이들은 둥글게 모여 앉아 한국의 토종 게임인 아이 엠 그라운드를 시작으로 강렬한 K-POP을 뽐내며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역시 춤과 놀이는 국경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 문화와 놀이에 관심을 보인 이탈리아 청소년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한국 청소년들은 그들에게 한국의 놀이 문화를 가르쳐 주며 함께 게임하고 춤추며 서로 동화되어 갔다. 그렇게 그들은 새롭게 외국인 친구들도 사귀었고, 어른들이라면 술 없이는 나누기 힘든 기쁨과 우정을 춤과 놀이로 밤새 나누었다.

 


 

“Viva Papa!”

 

우리는 가톨릭보편된 하나의 교회라고 믿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과 장소는 바로 전 세계 청년들이 하나 되는 가톨릭 세계 청년 대회(WYD)’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인종, 다른 언어, 다른 문화로 쌓아 올린 바벨탑과 장벽이 한순간에 녹아 없어지듯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어 갔다.

 

그 절정의 순간은 바로 미사를 통해 드러났다. 전 세계 청년들이 함께 모여 봉헌한 개막 미사를 시작으로, 본대회 중간에 추기경님 명의 본당에서 봉헌한 서울대교구 미사, 그리고 교황님과 함께한 철야 기도와 폐막 미사가 그것이다. 그중 세계 청년 대회의 백미는 단연 교황님과 함께하는 밤샘 기도와 폐막 미사라고 할 수 있다. 무려 백만 명이나 되는 전 세계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인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 모든 청년의 가슴을 가장 설레게 하는 순간은 교황님이 파파모빌을 타고 등장하시는 순간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한목소리로 “Viva Papa!”를 외치며 새로운 교황님 레오 14세를 열렬히 환호했다.

 

우리 한국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다음 WYD 개최국 특권으로 제대 맨 앞자리에 앉는 행운을 누렸다. 교황님을 바로 눈앞에서 뵙고 함께 기도했던 그 모든 순간은 내게 더할 나위 없는 큰 축복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감동은 바로 아이들의 눈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밤샘 기도를 하는 동안 몇몇 청소년 아이들은 진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과연 한국에서 아이들의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 모습은 잔잔한 여운으로 오래도록 내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희망의 증인

 

한국에 돌아온 뒤 나는 좀처럼 로마 희년 순례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청소년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순례 내내 열정적인 K-POP 춤사위를 뽐내며 미래 아이돌 가수를 꿈꾸던 여자아이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보인 눈물과 고백은 내 마음을 깊이 울렸다.

 

한국을 떠났을 때는 마치 어항을 탈출해 마음껏 바다에서 헤엄치는 느낌이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다시 어항에 갇힌 느낌이에요.”

 

나는 깨달았다. 마치 어항 속에서 희망도 절망도 없이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것만 같던 우리 청소년들에게도 미래를 향한 꿈과 희망, 그리고 열정이 있었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이 바로 이번 희년 순례의 여정을 통해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서로 대화할 수 있었고,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희년이 가진 특별한 의미와 은총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번 희망의 순례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특별한 시간이었고,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깊은 은총의 체험이었다. 이제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일 뿐 아니라 희망의 증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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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필리핀 마닐라 교황청립 산토 토마스 대학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용산성당 부주임 신부로 사목하며,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일상 안에서 그리고 작은 이웃 사랑의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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