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특집② “두렵고 겁이 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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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특집② “두렵고 겁이 납니다만”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편지에 담긴 희망의 메시지

2026. 09. 02
읽음 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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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기를 내어라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한국 순교 성인의 믿음과 용기를 돌아봅니다

고독과 불안 속에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우리도 그처럼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께 희망을 둘 수 있을까요?

내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았던 그의 삶에서, 오늘 우리가 걸어갈 희망의 길을 만나 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위로시요, 우리의 희망이시며, 우리의 원의이시니,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죽습니다.”

─ 첫 번째 편지, 1842426

 


 

마카오에서 홀로, 하느님을 바라보다

 

1842년 마카오의 작은 방, 홀로 앉아 펜을 들고 있었을 젊은 최양업 토마스 신학생의 모습을 마음에 그려 봅니다. 철학 공부를 마치고 신학 공부를 시작하던 해, 스승이신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드린 이 첫 번째 편지에는 신학생의 내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유일한 동료 신학생 김대건 안드레아는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 입국 경로를 탐색하러 떠났고, 신학생 최양업은 마카오에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작은 책상과 작은 의자, 단출하고 소박한 방에 앉아 자신의 스승 신부님께 글을 쓰고 있는 젊은 신학생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 모습에서는 고독과 고요함이 느껴집니다.

 

그 고독과 고요함은 때로 외로움과 불안으로 흔들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최양업은 박해받는 고국과 목자 없는 신자들, 그리고 순교자들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기도 속에서 최양업 신학생은 하느님께 위로를 받고, 오직 그분께 희망을 두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최양업 신부님의 이런 믿음을 어떻게 본받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만이 나의 위로

 

첫 번째 편지에는 모든 것이 오직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고백하는 젊은 신학생의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낯선 땅, 낯선 문화 속에서도 위로자이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믿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작은 위안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위로이시며, 희망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처럼 주님께 의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풍부한 자비에 희망을 갖고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저를 온전히 맡깁니다."

─ 세 번째 편지, 18461222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설렘과 기대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긴장과 불안을 안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박해 시대, 오로지 하느님과 고국의 신자들을 위해 사제가 되고자 먼 타향에서 살아가던 최양업 신학생에게 이 시간은 단순한 기대와 흥분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쁘게 몰아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불안하고, 때로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또 여러 어려운 관계 속에서 갈등하며 그 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외로움과 불안이 우리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내 안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우리는 이 감옥에서 얼마나 오래 갇혀 있을까요? 모든 것이 통제되고 의심으로 가득 차, 생각이 생각을 잡아먹는 감옥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갉아먹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편지는 이런 우리에게 용기를 내어 믿음을 가지라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라고 초대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자신의 고독과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용기 있게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유를 찾고 힘을 얻으셨습니다. 우리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용기를 내어 하느님을 찾고, 그 안에서 자유와 힘을 얻어야 합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희망합니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사람입니까? 재산입니까? 아니면 지식이나 건강입니까? 명예나 권력입니까? 우리가 지금 나열한 것들에는 분명 끝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 그래서 희망하는 것은 남들이 보고 믿는 물리적인 것이나 곧 우리 눈앞에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된 희망을 가지려면 먼저 올바른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 없이 무언가를 희망한다면, 그 희망은 결국 우리를 제자리로 돌아오게 할 뿐입니다. 참된 하느님이 아니라 나의 뜻만을 채워 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께서는 편지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인내하며, 기도하고 애원하며 애덕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의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서 쏟으신 성혈을 기억하시고 가련하고 불쌍한 우리를 굽어보소서.“

 

올바른 믿음은 불확실한 시대에 확신을 주고, 불안한 시대에 평화를 찾게 하며, 혼자가 아니라 하느님과 늘 함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약함 속에서 찾은 용기

 

유일한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순교 소식을 들었을 때, 고국의 가련한 처지를 전해 들었을 때, 그리고 아직 선교지에 들어가지 못한 채 타지를 떠돌며 지쳤을 때에도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자신의 약함 속에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용기를 내셨습니다.

 

"저의 빈곤과 허약을 의식할 때 매우 두렵고 겁이 납니다만 하느님께 바라는 희망으로 굳세어져 방황하지 않으렵니다."

─ 세 번째 편지, 18461222

 

우리의 나약함은 약점이 아니라, 자신을 알기에 하느님께 온전히 맡길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자신을 올바로 아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시작이며, 그것이 곧 하느님께 향하는 길입니다. 오늘날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야 했던 때와 같은 어려움은 없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순교의 갈망, 그러나 하느님의 뜻

 

"언제나 저도 신부님들의 숱한 노고와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을까요?"

─ 두 번째 편지, 1844519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고국에 입국하기 전부터 이미 순교를 갈망하셨습니다. 아벨이 흘린 피처럼 순교를 통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길 원했습니다. 동료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순교 소식에 비통해하시며 자신도 순교의 월계관을 받고 싶어 하셨지만, 늘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 모든 희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고,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뿐입니다."

─ 네 번째 편지, 1847420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는 하느님보다 나를 선택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을 따르기보다 주님께서 우리의 뜻을 따라 주시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844, 신부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의 순교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습니다. 신부님은 늘 순교를 동경하면서도 자신이 순교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님께서 깨달으신 하느님의 뜻은 자신이 단번에 주님께 목숨을 바치는 순교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뜻은 신부님의 편지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산골의 신자들, 조씨의 고백

 

먼 산골에는 오직 사제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평생에 한 번이라도 사제에게 성사를 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열아홉 번째 편지에는 조씨 성을 가진 양반이요, 학자요, 상당히 부자였던 한 예비 신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모든 재산을 팔고 고향을 떠나 교우촌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러나 포졸들이 그의 집에 불을 질러 그는 거의 알몸으로 쫓겨났습니다. 이후 친구들에게 구걸하며 겨우겨우 연명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얼마 전까지 아무런 아쉬움 없이 풍족하게 살던 자신의 처지를 크게 한탄하거나 원통해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아직 신부님을 만나지 못해 세례를 받지 못한 것만이 유일한 고통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자들을 위해 걸었던 길

 

이러한 소식들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이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여정을 걸으셨음을 보여 줍니다. 기도 안에서 사제는 신자를 통해, 신자는 사제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서로 찾아갑니다.

 

실제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116개월 동안 짚신을 신고 매년 7,000(2,800km)가 넘는 산길을 걸어,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신부님은 신자들을 위해 모든 기력을 쏟아부으셨고, 결국 박해자의 칼날이 아니라 극도의 과로와 장티푸스로 1861615일 길 위에서 선종하셨습니다. 신부님의 시신은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배론 성 요셉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습니다.

 


 

나의 뜻, 하느님의 뜻

 

우리는 늘 하느님께 많은 것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기를 청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청을 당신의 뜻과 때에 따라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옳은 삶은 하느님께 청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돈을 넣으면 물건이 나오는 자동판매기도 아니시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는 요술 램프의 지니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해가 되거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기도는 우리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때까지 들어주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찾았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내어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기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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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원주교구 사제. 배론성지 주교대리와 문화영성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서품 성구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를 마음에 새기며, 끊임없이 진리를 찾아 나섰던 토마스 사도의 삶을 닮고자 합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희망하며 오늘도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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