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욕적 사랑(amor concupiscentiae)입니다. 이 사랑은 자기를 위한 선을 얻으려는데 관심이 있으며, 자기의 행복과 번영과 완성을 추구합니다. 또한 대상으로부터 얻을 이익을 고려해 사랑합니다.
두 번째는 향락적 사랑(amor complacentiae)입니다. 이 사랑은 즐거움에만 머무는 사랑이며 감상에 불과하고 봉사를 하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간혹 가치를 얻으려는 원의와 결심을 하도록 이끌기도 하지만 여전히 나를 위한 선을 얻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자애적 사랑(amor benevolentiae)입니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보존 및 발전을 위한 사랑으로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입니다. 물질적 혹은 정신적으로 궁핍한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두는 자선적 사랑이 여기에 해당하며 흔히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사욕적 사랑과 향락적 사랑은 자신에게 비중을 두고 있지만 자애적 사랑은 타인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애적 사랑이 온전히 타인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타인을 향한 사랑과 배려가 온전히 자신에게 이익이 되므로 이 안에는 나 자신과 타인 모두가 균등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 사랑의 정의와 본질
그렇다면 자애적 사랑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을 “원수 사랑”과 단순하게 연결한다면, 앞서 말씀드린 심적 부담감이 더욱 커집니다. 원수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행복의 범주를 좀 더 넓혀 보면 새로운 이해가 가능합니다.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생활 속에서 기쁘고 즐겁고 만족을 느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흉악한 범죄자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무언가를 훔치거나 생명을 파괴한 그자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양심의 가책을 홀로 받는 경우는 당연하며,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질서에 어긋나 있으며 사회적 처벌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람의 ‘기쁘고 즐거운 상태’를 의미한다면 범죄자의 행복, 즉 그의 올바른 삶을 위해 무언가를 행해야 할 필요가 생깁니다. 즉, 사회적 책임을 물어 그가 다시 그러한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성전 정화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요한 2,13-22 참조). 또한 경비병 하나가 뺨을 치자, 예수님께서는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라고 말함으로써 진실을 왜곡하는 태도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십니다.
이에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불의와 악의 현실은 단순히 무시하거나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의는 반드시 대항해야 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자비가 있다.”
윤리 신학자인 베른하르트 해링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원수들의 회개에 필요하거나 적어도 유용할 경우에 그러한 높은 이상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참는 것이 오히려 오만과 비타협을 굳혀줄 뿐이라면 참을 필요가 없으며 또 참아 주어서도 안 된다.”
결국,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용서의 대상은 막연히 사랑받아야만 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누군가에게 명백한 잘못이 있다면, 즉 주관과 관계, 상황에 따르는 잘못이 아닌 객관적 잘못이 있다면 피해자는 최선의 인내와 강력한 자제로, 그리고 필요하다면 법을 발동해서라도 원수 자신이 회개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는 같은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올바른 정의가 구현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합니다.
2. 복수와 용서, 그리고 악감정
하지만 사랑이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보인 사랑은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확실히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수에게 책임을 지우고 법적 조치를 취하는 데 있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행위에 앞서, 악의에 찬 증오와 복수심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가해자가 진심으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배상하려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그와 화해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가해자가 무지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무죄는 죄책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해자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피해자가 모든 이해력과 인내심을 가지고 고려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 말씀의 의미가 더욱 잘 드러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복수와 용서를 구분해야 하겠습니다. 복수란, 정의에 대한 갈망이 앙심과 증오로 변질된 것, 자신에게 피해를 준 상대에 대해 공격적인 감정을 품게 하는 마음의 명령입니다. 한편, 용서란 다른 사람이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너그럽게 봐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하지 않아도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면에서 불편함과 분노를 가지고 있어도, 개인이 그것을 마음에만 품고 있다면 복수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복수와 상반된 개념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용서”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악감정”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음속에 악감정을 갖지 말라”라는 의미를 가짐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원수를 용서하는 방법을 몇 가지 제시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용서란, ‘기억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원수를 위한 기도’를 동반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법적인 책임을 묻게 하더라도 그것은 분노와 복수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참된 생활을 위한 선한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한편, 복수의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복수란, 상대의 고통을 바라는 차원에서 책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속 분노를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 즉 악감정을 가지고 지속해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악감정이 남아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다른 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감정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속에 악감정이 있다면 파괴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3. 이웃 사랑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의지
바로 여기서 예수님이 왜 그토록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셨는지 분명해집니다. 이웃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앙심과 분노가 가득해져 오히려 불행해집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험담, 증오, 원망, 혐오. 이 얼마나 우리를 스스로 상처 주는 것들입니까?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원수와 나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그를 잘 돌보아 주세요. 제가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해 주세요. 서로 악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러한 기도를 올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보듬어 주실 것이며 끝내 이웃과 화해할 기회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 사랑을 드리는 구체적인 시작점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화해와 사랑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가에 대한 악감정으로 어두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분노와 미움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자연스럽게, 그가 더욱더 밝은 길을 살아가도록 이끌고 싶을 것이며 그로 인해 행여나 자신까지 부정하고 상처 입히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바로 그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의 상처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사랑이신 하느님의 마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