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교인이든 아니든 일단 죄는 선하지 않은 것, 악을 저지르는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악을 저지르는”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마도 대부분이 “악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인간이 정말 악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상상으로 짓는 죄, 마약 등과 같이 타인에게 죄를 짓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므로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양심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을 해치는 것도 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혹은 상상은 행동으로 나오기 마련이고 마약 등과 같은 행위도 나 스스로의 몸과 정신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죄의 기준을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가에 둘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 죄의 기준
그렇다면 과연 죄의 기준을 어디에 맞춰야 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것이 명확한데, 바로 하느님의 아주 오래된 약속, 즉 주님의 계명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죄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만약, 주님의 계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죄의 기준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인가?
결론부터 바로 말씀드리자면, 아닙니다. 모든 이의 죄의 기준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창조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모든 이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양심을 통해, 사회적 질서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당신의 계명을 투영하십니다. 그리고 이 계명에서 오는 윤리적 요구를 교회는 “도덕률”이라고 합니다. 이 도덕률은 어떠한 시대에도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일종의 질서를 요구합니다. 이는 자연법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요. 자연법이란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모든 사물의 자연 본성에서 나오는 윤리 질서이며 자연히 존재하는, 사회가 성립되기 전부터 존재하는 언제 어디서나 유효한 법입니다. 또한 인간 이성과 타고난 천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법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일종의 보편적인 법, 영원한 법으로 모든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사회적 법을 통해 하느님을 따르게 된다면, 굳이 죄에 대해 우리가 배울 필요가 있습니까? 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제 양심에 따라 살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교회는 구체적인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지속해서 상기하지 않으면 인간이 하느님께 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진리, 즉 하느님의 계명에 대한 숙고가 없다면 인간의 양심은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회적인 법은 하느님의 계명을 바탕으로 세워지지만, 인간의 사고와 문화에 따라 오류를 담게 될 수 있으며 특정인의 이익을 위해 남용될 우려도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계명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지만 인간의 법은 소위 “오염”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죄의 의미와 종류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죄”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을까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죄는 영원한 법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위, 욕망이다.”라고 이야기하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죄는 하느님에 대한 모욕이다.”(1850항)라고 이야기합니다.
죄는 일단은 크게 “대죄”와 “소죄” 두 가지로 나뉩니다. “대죄”는 다른 말로 “죽을죄”라고 불리고, “소죄”는 “용서받을 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요. 아마 많은 분이, “얼마나 큰 죄를 대죄, 죽을죄라고 부를지 궁금해하실 것 같고, 아마 내가 지은 죄는 소죄, 용서받을 죄 정도가 될 거야.”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우리의 사소한 대부분의 죄는 사실 대죄, 죽을죄에 들어가고 소죄에 머무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대죄와 소죄의 결정적인 기준은 “십계명인가 아닌가”, “고의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간단히 대죄와 소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죄란, “하느님을 저버릴 만큼 중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자유로이 짓는 죄”입니다. 또한, “십계명을 어김으로 하느님과 인간 모두의 사랑을 파괴하는 죄”이기도 합니다. 이 대죄의 특징은 “하느님보다 못한 것을 하느님보다 낫게 여김으로써 최종 목적이며 행복이신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소죄, 용서받을 죄는 무엇일까요? 소죄는 사랑을 어기고 해치기는 하지만 사랑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 죄, 예를 들면 누군가에게 충동적으로 짜증을 내는 경우입니다. 이 소죄는 무질서를 내포하긴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에 어긋나지는 않는 경우가 해당하며, 가벼운 문제에 대해 도덕률이 정한 기준을 지키지 않았거나, 중대한 문제에 도덕률을 어겼지만, 완전히 인식하지 못했거나 동의하지 않은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사실상 우연히 저지르게 되는 죄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죄는 선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는 죄라고 보시면 됩니다.
결국 대죄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대한 문제를 대상으로 하고, 즉 십계명을 어기고, 완전히 내 행동이 죄임을 인식하면서 고의로 죄를 저지를 경우 대죄입니다. 여기서 또한 중요한 것은, 고의가 아닌 무지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경감시키긴 하지만 사람은 양심을 가지고 있기에 도덕률의 원칙을 모른다고 간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죄의 결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알면서 저지르게 되는 대죄는 사랑을 상실하게 하고 은총의 지위 상실을 초래합니다. 대죄가 뉘우침과 하느님의 자비로 속죄되지 않을 경우 하느님 나라에서 추방되고 지옥의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한편, 소죄는 점점 대죄를 야기합니다. 윤리적 선의 실천과 영혼의 진보를 방해하며 잠벌을 받게 하기 때문이지요.
꽤 엄격한 대죄의 기준에 조금 놀라시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너무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대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용서가 아무런 대가 없이 막연하게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회개”가 필요하고 “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사의 은총을 통해 바로 이 대죄를 용서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