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에서 가장 길고도 영적이며 아름다운 대화.”
요한 복음서 4장 대부분을 차지하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한 인물과 그토록 오랫동안 대화한 장면이 드물다. 그중 가장 긴 대화를 나눈 상대방이 풍부한 학식을 가진 유다인이 아니라, 당시에 천대받았던 비참한 이방인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신비롭게 다가온다.
과연 예수님이 만난 이 사마리아 여인은 누구일까? 예수님은 왜 이름 모를 사마리아 여인과 그토록 오랫동안 대화하셨을까? 그 후 이 여인에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가 ‘니코데모 - 그가 그분을 만난 뒤로’에서 살펴보았던 니코데모와 비교해 본다면. 이 여인에게 흥미를 가질 만한 부분이 더 많이 드러난다. 예수님과 니코데모,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실제로 3장(니코데모)와 4장(사마리아 여인)에 나란히 위치하여 뚜렷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 니코데모는 등장하자마자 이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의 이름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없다.
아마 이는 니코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의 사회적 처지가 주는 메시지일 것이다. ‘유명有名한 사람’과 ‘무명無名’의 차이. 니코데모는 최고 의회 의원으로서 많은 사람에게 존경과 찬사를 받았지만, 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떠한가. 그녀는 복잡한 과거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던 사람, 사람들을 피해, 혼자 살았을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니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 있을까?
◈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요한 3,2). 하지만 이 사마리아 여인은 밝은 낮, 정오 무렵에 예수님을 만났다(요한 4,6).
우리는 앞에서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밤이 빛을 아직 체험하지 못한 그의 영적 상태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후 두 차례 요한 복음서에 다시 등장하여 서서히 밝은 빛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사마리아 여인은 어떠한가? 처음부터 그녀는 밝은 시간에 예수님을 만나고, 바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니코데모와 달리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완전히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던 것일까?
◈ 무엇보다도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니코데모의 대화보다 더욱 길고 풍성하고, 그에 못지않게 영적이며, 더욱 빨리 열매를 맺는다.
니코데모는 첫 등장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예수님의 장례 장면까지 천천히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지만(7,50-52; 19,38-42), 사마리아 여인은 대화 말미에 즉시 사람들에게 달려가 그분을 만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4,29-30.39). 니코데모는 많은 교육을 받고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했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아무래도 그만큼의 교육 혜택을 누리긴 힘들었을 것이란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여러 흥미로운 점을 통해 사마리아 여인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정말 이 여인은 누구일까?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어떤 체험을 한 것일까?
복음서는 처음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게 된 계기를 인상적인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 했다.”(요한 4,4)
“가로질러 가셔야 했다.”
희랍어 원문에서 ~해야 한다(영어의 must to에 해당)라는 의미를 가진 dei가 쓰인 이 표현은,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어떤 행위를 나타낼 때 쓰인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까?
당시 유다에서 갈릴래아로 향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복음에 나온 대로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는 방법, 다른 방법은 동쪽에 있는 요르단강 계곡 쪽으로 돌아가는 방법이었다. 상식적으로는 사마리아를 통해 가까운 길로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 시절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4,9).
예루살렘만이 유일한 성전이라는 불문율을 갖고 있던 유다인은 기원전 4세기 말경에 그리짐산에 따로 성소를 세운 사마리아인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사마리아인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불합리하게 대우하는 유다인을 좋게 보지 않았다. 치안이 허술했던 당시엔 이처럼 관계가 좋지 않은 사마리아인 지방을 지나가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도 유다인은 정결법 문제를 준수하는 것에 굉장히 예민했기에 사실상 저주받은 이방인 취급을 했던(8,48 참조) 사마리아인과 접촉을 최대한 피했다. 하여 자연스레 유다인은 이 길을 꺼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길을 가셔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비참함 가운데 있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기 위한 주님의 뜻이었을까.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은 관심을 가지고 찾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 여기고 지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주님은 다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찾으신다.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하고 부담스러울지라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다. 이 이름 모를 여인을 찾기 위해 주님께서는 반드시 이 길을 가셔야 한다고 느끼신다. 이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듯 느껴질 때도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길을 가시다 지친 예수님께서는 어느 우물가에 앉으신다. 이 우물은 야곱이 요셉에게 물려준 것으로, 아마 스켐 지역을 물려준 야곱 이야기와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인다(창세 48,22 참조).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다인과 달리 오경만을 정규 경전으로 삼고 이를 토대로 독자적인 종교 생활을 이어 나갔는데, 실제로 사마리아 오경이라는 경전을 지니고 있을 정도였다. 야곱을 자기 조상이라고 모신 이유도 그들이 오경을 공유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나름 성조들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그리짐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이스라엘 유배 이후 많은 외국인과 혼종 혼인을 했기에 유다인에게는 한 형제가 아닌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라고 먼저 말씀하신 것에 사마리아 여인이 놀란 이유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