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하신 아버지의 품으로

영성과 신심

영원하신 아버지의 품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기억하며

2025.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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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21, 부활절 다음 날인 천사의 월요일(Lunedì dell'Angelo)’ 이른 아침.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종 소식과 함께 로마 전역은 말할 수 없는 침묵에 잠겼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종소리는 평소 기쁨과 영광을 알리던 그 소리와는 달리, 이날만큼은 한없이 길고 느리게 울려 퍼지며 깊은 슬픔을 품고 있었다. 그날, 작가 미리암 마리아 산투치(Miriam Maria Santucci)는 교황님의 서거를 기리는 시 <마지막 포옹 L’ultimo abbraccio>를 바쳤다.

 

만물이 다시 태어나는 그날, 당신은 다시 한번 세상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셨습니다. 희미한 한 줄기 목소리, 그러나 그것은 천 마디 말보다 강하게 사람들 사이를 어루만지며 지나갔습니다. 그날은 부활절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당신의 인사는 이미 하늘의 향기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없이 우리에게 작별을 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당신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그토록 한결같은 겸손과 미소로 섬기셨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오전 1035분경, 교황님의 선종이 공식 발표되자, 신자들은 하나둘 바티칸 성문 앞에 모여들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저녁 6시 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추기경단이 주례한 묵주 기도는 의례적 행사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이들이 서로를 다독이며 하느님 앞에 함께 머무는 시간이었다. 현장을 찾은 한 기자는 로마 전체가 슬픔에 잠겨 고개를 떨군 듯했다.”라고 전했다. 평소라면 분주했을 거리의 상인들도 조용히 신자들을 맞이했으며, 복잡해진 도로에서도 운전자들은 반쯤 내려진 교황 깃발 앞에서 성호를 긋고 경건히 지나갔다.

 

저를 사랑해 주셨고 앞으로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실 분들에게 주님께서 마땅한 상급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제 삶의 마지막에 맞이하는 고통을 온 세상의 평화와 만민의 형제애를 위하여 주님께 봉헌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유언중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살아 계실 때부터 검소함을 몸소 실천하셨으며, “그리스도교의 최고 통치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종들의 종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셨다.

 

422일 오후, 입관 후 신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교황님은 그분의 그러한 바람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했다. 화려한 장식도, 장엄한 행렬도 없이, 소박한 붉은 천에 감싸인 목관에 누운 모습, 생전에 신으시던 검은 색 낡은 구두. 그리고 두 손에는 작은 묵주 하나가 쥐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는 깊고도 변함없는 위엄이 스며 있었다.

 

대낮의 뜨거운 태양과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도 교황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는 신자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고, 그 때문에 자정이 넘도록 성 베드로 광장은 기도의 물결로 환히 밝혀져 있었다. 또한 직접 찾아올 수 없는 이들은 24시간 생중계 화면 앞에서, ‘양들의 냄새를 지녔던 이 겸손하고 선한 목자와 마지막 시간을 함께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은 어디든 기도의 집이 되고 있었다.

 

 

온 세상의 슬픔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

보통은 로마에서 온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지는 교황의 장엄한 축복을 뜻하는 이 말이, 이제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애도의 물결을 나타내고 있었다. 마르타의 집 경당에서 시작된 이 조용한 슬픔은 도시를 넘어, 국경과 종교의 경계를 넘어, 세상 모든 곳으로 번져갔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추기경과 주교, 희년을 맞아 로마에 모인 순례객들은 물론, 동방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이슬람, 유대교의 지도자까지도 교황님의 천상 안식을 기원하며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가톨릭 신자이든 아니든, 많은 이들은 교황님과의 만남을 기억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로마의 작은 본당을 깜짝 방문하셨던 일, 고통받는 이들에게 어느 날 걸려 온 안녕하세요, 교황입니다!”라는 전화, 노숙자들과의 식사, 람페두사에서의 눈물, 성목요일에 무릎 꿇고 죄수들의 발을 씻으시고 입 맞추던 모습.

 

특히 거리의 사람들, 병들고 버려진 이들, 난민들, 노인들, 어린이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고통받는 모든 이름 없는 이들에게 있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인간의 존엄을 일깨워 주신 살아 있는 증인이셨다. 세월호 참사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던 한국 국민들에게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외치셨던 그분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교황님은 모든 이와 가까워지기를 열망하셨고, 특히 가장 작은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열린 마음을 지닌, 민중 속의 교황이셨습니다.”

(레 추기경, 교황님 장례 미사 강론 중)

 

민중 속의 교황이었던 그분의 사랑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온 인류와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로 뻗어 있었다. 그러기에 신앙을 가진 이든 그렇지 않은 이든, 그분의 선종은 깊은 상실로 다가왔다.

 

 

기억, 그리고 사명

어쩌면 지금 우리 가운데도,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처럼 침통한 얼굴로 길 위에 멈춰 선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분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수록, 교회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을 짓누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자리, 이 갈림길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빈 무덤을 스승님의 시신마저 잃어버린 허무한 결말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말씀하신 대로 되살아나셨음을 알리는 부활의 징표로 믿을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한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남기셨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어떤 것의 시작입니다(La morte non è la fine di tutto, ma l’inizio di qualcosa).”

부활의 신비를 묵상하는 이 복된 시기에, 아무런 장식도 없이 다만 Franciscus라는 이름만이 쓰인 그분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다시 듣는다. 죽음 너머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고, 밤의 끝자락에서 부활의 새날이 떠오르고 있다고. 이보다 더 깊고 생생한 희망의 증언이 또 있을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나쁜 상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입니다. 그것이 나쁜 것인지 아닌지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 모두는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멋진 일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마중 나오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라,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아, 어서 와 나와 함께 가자.’”(프란치스코 교황, 2017. 11.17, 마르타의 집 강론 중)

 

이 종말론적 희망은 단지 내세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 아니다. 그것은 이 땅 위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교회와 언론은 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떠나보낸 상실감에서 벗어나, 그분께서 생전에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그리스도교적 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곧 주님께 희망을 둔 가난한 이들로서, 우리는 더 변두리로, 더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 신발에 먼지를 묻히며 복음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눈물을 닦고 다시 길을 나설 시간이다.

 

 

세상에 남은 이들의 여정은 계속된다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기억과 영원 사이를 살아가는 도시, 로마. 이곳은 유구한 역사 안에서 눈부신 제국의 유산과 가난한 복음의 약속이 교차하는 자리다. 그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종은 단순히 로마의 주교가 자신의 직무를 마쳤다는 의미 그 이상이다. 이는 영원하신 분을 향해 완성되어 가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또 한 장의 페이지가 조용히 넘어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는 베드로 사도좌의 닫힌 문 너머로, 미켈란젤로가 그려 낸 <천지창조>의 거대한 시스티나 천장화 아래에서, 상실의 슬픔을 지나 다시 성령의 숨을 호흡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광장을 울리던 종소리는 잠시 멈추었지만,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굳센 희망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내 주셨던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시기를, 다시 흰 연기가 솟아오르기를, 그리고 다시 한번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이라는 목소리가 세상 속에 울려 퍼지기를……. 그때까지, 이 영원한 도시는 또 얼마간의 시간을 고요한 침묵과 기도 안에 머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연설이나 개별적인 만남을 마치며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이제 저희는 당신께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늘에서 교회를, 로마를, 온 세계를 축복해 주시기를! 지난 주일, 이 대성당 발코니에서 모든 하느님 백성과, 나아가 진심으로 진리를 찾으며 희망의 횃불을 높이 들고 있는 온 인류와 마지막 포옹을 나누셨듯이 말입니다.”(레 추기경, 교황님 장례 미사 강론 중)

Profile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소속으로 현재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 살아계신 하느님의 음성이 인간 언어의 희미한 잡음을 넘어 선명하게 울리도록, 마치 오래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 조심스러운 손길과 눈길로 성경을 읽고, 되새기며, 이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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