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승천 대축일 아침, 루치아 언니가 축하 문자를 보냈다. 내 세례명이 ‘마리아’이기 때문에 축일을 축하해 준 것이다. 나는 다시 대모님께 축하 문자를 보내 드렸다. 대모님도 ‘마리아’여서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수녀님은 “우리 셋 다 마리아야!” 하면서 동시에 꽉 안아 주셨다. 그런 포옹 역시 그간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맺어질 수 있는 자매애라는 것.
‘그래, 마리아, 고마워. 요즘 많이 바쁜가 봐!’
청년부 미사를 다니면서 혹시 대모님이 내가 성당을 안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혹시 정말 그런가 싶은 생각이 스쳤다.
‘요즘 청년부 미사를 가느라 대모님을 한동안 못 뵈었어요!’
나는 설명했다.
‘응 그래, 더위 한풀 꺾이면 얼굴 보자~’
대모님은 평소와 같은 명랑함으로 대화를 맺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은 성모 마리아님이 지상의 생을 끝내고 예수님께서 계신 하늘로 올라가셨음을 기념하는 가톨릭의 축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광복절과 겹쳐 여러모로 경사스러운 날이다. 그리고 반드시 미사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 축일’이기도 하다. 한국의 의무 축일은 모든 주일 이외에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월 1일)’과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 그리고 우리가 ‘크리스마스’라 부르는 ‘주님 성탄 대축일(12월 25일)’이 있다.
앵무새 한 마리와의 관계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성상에 예를 올리고 앵무새 어이와 인사했다. 오늘도 어이는 날 알아보고 철장을 사다리처럼 붙들고 이동해 눈 맞춰 주었다. 어이 덕분에 아는 신자분이 생겨났는데, 그는 집에서 앵무새 두 마리를 키우는 ‘전문가’였다. 우연히 케이지 앞에 같이 서게 된 우리는 어이를 화제 삼아 얘기를 나누었고 미사 때마다 그 앞에서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한 번도 앵무새를 키워본 적도, 사실 키울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나는 그간 어이의 행동이 궁금할 때마다 챗지피티에게 물어봤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날 뿐인데 어이가 나를 정말 알아보는 건지?
챗지피티는 그렇다고 했다.
몸을 긁어 달라고 하는 것 같은데 어디를 긁어야 좋아하는지?
챗지피티는 날갯죽지나 목덜미를 추천했다.
그렇다면 나를 왜 좋아하는지?
그것까지 답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무조건 답하기로 모델링되어 있는 챗지피티는 앵무새는 갑작스럽지 않고 느리고 조용조용한 몸동작과 태도, 목소리를 선호하기 때문에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라며, 한 번 본 적도 없는 앵무새 어이의 마음까지 읽어 주었다.
“이렇게 문 열어 놔도 돼요?”
그분은 아예 철장 문을 열어 어이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어이는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크기로 풍성하게 날개를 펼치며 기분 좋아했다.
“네, 괜찮아요.”
그는 이렇게 열어 놔도 어이가 나오지를 않는다며 오히려 걱정했다.
“케이지가 넓다 해도 여기에만 종일 있으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놀자고 열어 놨는데 겁이 나는지 안 나오네요.”
크게 펼친 어이의 날개는 마치 흰 꽃처럼 희고 풍성했다.
“너 날개 되게 예쁘다. 근데 여기에 털이 빠져 있는데 이건 괜찮나요?”
내 질문에 전문가 신자분은 어이의 날갯죽지를 펼쳤고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나이 탓이라며 이 정도면 건강한 상태라고 답했다.
“어이는 겁은 많지만 사람을 좋아하고 잘 받아들여요. 이렇게 자기 몸을 만지게 허락하는 애들 흔치 않거든요.”
“근데 자기 먹이 물어서 몸쪽으로 뿌리고 부리로 이리저리 옮기는데 왜 그런 거예요?”
챗지피티는 아마도 자기 몸을 청결히 하고 싶은 거라고 말했었다.
“아마 꾸미고 싶은 욕구일 거예요. 저희 집 애들도 휴지나 종이를 뽑아 깃에 꽂으며 놀거든요.”
아,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구나. 역시 경험에서 나오는 앵무 반려인의 분석은 챗지피티보다 훨씬 설득력 있었다.
하지만 이런 어이와의 조우에도 문제는 있었다. 같이 있다가 미사 시간이 되어 이층으로 올라가면 성당 마당이 떠나가라 우는 것이었다. 그날도 미사를 드리는 내내 울음소리가 들렸고, 마음이 착잡해졌다. 책임지지 못할 일을 만들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잠깐 귀여워하다가 쌩 올라올 거라면 차라리 모른척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들을 잃은 슬픔을 모두 견디고 지상의 삶을 완수한 마리아님을 기념하는 날, 나는 앵무새 어이와의 관계를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작가라고 하면 현실의 문제들을 이기고 나온 커다란 나무 같은 존재를 상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더 예민한 통각과 긁히고 패인 상처와 평온을 해치는 문제들을 가진 경우가 더 많다. 어쩌면 그래서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일상을 숙고하고 생각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서일지도. 앵무새 한 마리와의 관계도 그 무게는 깃털처럼 가볍지 않은 것이다.
죽음이 품고 있는 생명, 종말이 품고 있는 탄생
미사가 끝나고 신부님이 축일을 기념해 수박을 준비했다고 말씀하셨다. 지난주에 수박을 권하는 성당 분들을 피해 도망갔던 나는 오늘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전을 빠져나오는데 신부님이 “아참, 마리아, 축일 축하해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감사하다고 답하면서 천천히 뒤로 빠졌고 기회를 틈타 성당 문을 조용히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려는 찰나, 한 성당 자매님이 팔을 활짝 펼쳐 나를 가로막았다.
“안 돼요!”
여태껏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를 가로막은 자매님은 없는 터라 나는 당황했다.
“그냥 가시면 절대 안 돼요. 이 수박 얼마나 맛있는데요. 꼭 드셔야 해요!”
자매님 표정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 진지했다. 하느님께서 자매님에게 알려 주셨나 싶을 정도로. 낯가림이 너무 심한 나머지 미사만 끝나면 연기가 되어 성당을 고요히 빠져나가는 가련한 새 신자가 있으니 붙들어 어떻게든 친교의 시간을 가지게 하라고. 나는 접시에 놓인 수박을 한 조각 집었다. 수박은 맛있고 달콤했다.
“마리아 씨 오늘 축일이에요.”
신부님이 한마디 더 보태자 자매님 눈은 더 휘둥그레졌다.
“그래요? 그러면 두 개 드셔야 해요! 생일이니까!”
두…… 조각. 내 앞에 떨어진 수박 두 조각의 미션을 수행하는 동안 신부님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이야기를 하셨다. 그 영화를 생각하면 주인공(한석규 분)이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나서 그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여름 마당에 씨를 툭툭 뱉으며 수박을 먹던 장면이 생각난다고. 나 역시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수박씨를 무심히 툭툭 던지며 받아들이던 선선한 이별의 형태를 말이다.
나는 요즘 들어 신부님이 죽음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언제나 그리스도교는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출발한 새 삶이라는 역설 속에 있지 않은가.
죽음이 품고 있는 생명, 종말이 품고 있는 탄생. 그 역설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 아닌가. 그런데 그러자면 마음은 얼마나 열리고 열려야 하며 영혼은 담대해져야 할까. 팽팽한 긴장이 아니라 이해를 거듭함으로써 애드벌룬처럼 둥실 떠오르는 용기와 지혜. 수박 두 조각을 무사히 먹은 나는 훨씬 가벼워진 마음으로―당당히―성당을 나섰다. 힐끔 뒤돌아보니 어이는 어느새 다른 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손길을 나누고 있었다.
사진 ⓒ 김금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