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이라는 말 자체가 일종의 해방감을 주었어요.”

가톨릭 예술

“역설이라는 말 자체가 일종의 해방감을 주었어요.”

《역설들》을 번역한 곽진상 신부님을 만나다

2025. 02. 09
읽음 233

《역설들》 읽기 

20세기 가톨릭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프랑스의 신학자 앙리 드 뤼박의 통찰이 담긴 《역설들》이 출간되었다. 뤼박의 신학 사상은 교회를 위한 새로운 신학적 지평을 열었고, 전통과 현대성을 조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베네딕토 16세 교황), “신학의 영적 깊이를 복원하려는 노력”(이브 콩가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역설들》은 뤼박의 신학 사상을 맛볼 수 있는 입문서로 역설을 통한 신학적 성찰과 묵상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앙리 드 뤼박의 독창적인 사유가 담긴 이 작품을 번역한 곽진상 신부와 만났다.

 


 

최근 출간된 《역설들》 표지 띠지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담겨 있어요. 교황님은 그리스도인은 예수회 신학자 앙리 드 뤼박이 매우 선호했던 표현처럼, 강렬하면서도 마음을 잡아끄는 역설로 신앙을 살아갑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처럼 역설은 저자에게 큰 의미를 지닌 개념 같아요. 신부님께 역설은 어떻게 다가오는 느낌인가요?

저는 신학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이성화 작업(rationalisation)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신학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질문에 이성적으로(rationellement), 곧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해야 과학 문명이 발달한 이 시대에 믿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고심을 거듭하던 중, “이것은 역설이다.”라는 말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역설이라는 말 자체가 제게는 일종의 해방감을 주었어요. 역설인데, 역설이 아닌 것처럼, 온갖 논리를 가져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너무 난해하게 느껴질 때, ‘유레카를 경험한 것입니다. 역설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다가 이단에 빠지거나 궤변을 늘어놓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역설을 역설이라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매우 좋았습니다. 억지로 이해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역설이라는 말을 해방감으로 느끼셨군요. 신부님께서는 이 책의 번역을 어떻게 맡게 되셨나요?

이 책을 번역하게 된 이유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이 책은 성경과 가톨릭 전통에 충실하고, 우리를 올바른 신앙생활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에는 이러한 책이 정말로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렇지만 가톨릭출판사에서 번역 의뢰를 받았을 때, 저는 좀 의아했고 오히려 출판사에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 책에는 각주가 많지 않아 읽기 쉬워 보이지만, 깊은 성찰과 숙고가 담겨 있고, 쉽고 편안한 글이나 감성적인 글을 선호하는 많은 신자에게 과연 읽힐까?”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출판사에서 우리 교회에도 사상적 깊이가 있고 영성적으로도 심오한 글을 출판해야 한다고 하여, 안식년 동안 제 할 일을 제쳐 두고 번역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앙리 드 뤼박을 잘 알고 계셨던 건가요?

저는 박사 과정에서 앙리 드 뤼박을 연구했는데, 그 계기가 참 역설적이에요. 앙리 드 뤼박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제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그분을 연구하게 되었거든요. 실천신학인 교리교육에 관한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에서 무슨 공부를 할까?” 하고 고민할 때까지만 해도, 사실 드 뤼박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논문 주제를 정하기 전에 파리가톨릭대학의 저명한 교수를 소개받아, 학문적 관심사를 나누고 연구 방향에 대해 자문을 얻기 위해 찾아갔어요. 그분은 루터교의 거장 불트만(R. Bultamann)을 전공하셨고, 저도 박사 준비 과정 세미나에서 불트만의 작품 《예수》(1926)에 매료되어 그를 깊이 연구하고 싶었죠. 그러나 그분은 제가 한국인이고, 한국은 가톨릭이 개신교에 비해 열세이며, 불트만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어를 배워야 하니, 차라리 가톨릭 신앙에 정통하고 프랑스어로 연구할 수 있는 프랑스의 대 신학자, 앙리 드 뤼박을 연구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셨어요.

 

정말 신기하네요. 신부님께서 앙리 드 뤼박을 만날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회 신학자 드 뤼박은 교부들의 연구를 통해 당시 주류를 이뤘던 스콜라 신학(사변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교회의 신앙이 우리 삶에 밀접하다는 점을 강조한 인물이었어요. 주류와 싸웠기에 처음에는 많은 반대에 부딪혔고, 심지어 고발까지 당해 예수회 내부에서 교수직 박탈이라는 처벌을 받기도 했어요.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 신학적 업적을 인정받았고, 공의회의 쇄신에 크게 공헌하여 훗날 추기경으로 서임되셨습니다. 드 뤼박은 신앙의 역설을 신학의 주제로 삼았어요. 저서 중에는 교회의 역설을 강조한 《역설과 교회의 신비》가 있고, 인간의 역설을 강조한 《초자연의 신비》가 유명합니다. 드 뤼박에 따르면, 신앙이 역설인 이유는 신앙의 내용이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역설을 통해 그 신비로 들어가는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삶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책의 1장 시작 부분의 글이 정말 인상적이었는데요. “역설이라는 단어 자체가 역설적이다. 그러므로 역설의 역설성을 그대로 두자. …… 복음이 역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인간 자체가 살아 있는 역설이고, 교회 교부들에 따르면, 육화야말로 최고의 역설이다. 모든 역설 중의 역설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역설이라는 개념을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 책은 그리스도 신앙의 역설적인 특성을 제거하려는 잘못된 철학적·신학적 주장들을 비판하는 단편들의 모음입니다. 역설이란 다른 말로 모순입니다. “빨리 천천히 오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서로 반대되는 것이 공존하는 것입니다(동시성). 또 이성적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를 가리키기 때문에 신비적 특성이 있어요. “역설의 역설성을 그대로 두자.”라는 저자의 제안은 이 신비적인 것을 이성의 한계 속에 가두거나 두 대립적인 것을 분리하여 한쪽만을 취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설 속에 있는 대립적인 것을 분리하는 순간 신비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역설이 표현하는 신비적 실재를 축소하거나 왜곡하지 말라는 주장이지요.

예를 들어,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예수님의 신비를 인간 예수로만 축소하거나 반대로 인간 예수를 무시하고 그분의 신성만을 바라보는 것은 오류입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4)라고 증언합니다. 구체적인 역사 안에 사셨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드님”(요한 1,34)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3-4)

 

책을 보니, 현대 신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앙리 드 뤼박 추기경의 글을 읽는 일이 결코 쉽지 않더라고요. 번역 과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시며 특별히 염두에 두신 부분이나 고민하셨던 점이 궁금합니다.

드 뤼박은 사상적 깊이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 매우 빼어난 프랑스어를 구사하기로 유명합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호들이 초대받는 프랑스 국립학술원의 회원이기도 했죠. 그의 글에는 강한 긍정을 표현하는 이중 부정문도 많고, 문화적 차이로 알아듣기 힘든 프랑스식 표현도 많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출처 표기도 없는 유명한 라틴어 문장도 자주 나옵니다. 그리고 드 뤼박은 당대의 저명한 학자의 글만 인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제가 잘 모르는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인용될 때마다 일일이 찾아보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표현 하나하나에 매우 신중하고 적확한 단어를 구사하는 학자이고, 반복을 싫어하는 프랑스적 언어 습관을 가지고 있어 처음 접하는 단어도 많았습니다. 또한 직설적인 표현보다 간접적 표현을 주로 사용하고, 뉘앙스를 함축한 표현을 선호해 문장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죠.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면 번역할 수 없는 노릇이므로 제가 먼저 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고, 이 과정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어요. 처음에는 본문을 존중하여 정확히 번역하고자 했으나, 그랬다가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 많은 부분을 의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역자의 주석도 많이 달았습니다.

 

정말 이 작품을 번역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혹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무관심에 관한 챕터의 첫 문장인데 모든 문화는 무관심하다.”(83)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단어로 구성된 단순한 문장인데, 목적어가 없고 그다음에 모든 관상도 마찬가지다.”라는 문장이 이어집니다. 이 두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뒤 문장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관상은 어떤 이익을 바라거나 자기의 생각이나 사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관조한 것이라 무관심하다라고 이해할 수 있겠으나, 실제로 인간이 만들고 가꾸는 모든 문화가 무관심하다라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인간이 형성하는 문화가 무관심하다는 것은 어떤 실용적인 목적이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이 문화와 관상의 역설성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영향력은 이 무관심에서 나온다. 이 영향력은 결과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 처음에는 드 뤼박이 당시 무신론, 탈종교에 대해 많이 비판했기 때문에 문화가 하느님, 신성한 것, 종교 등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이해했었습니다. 독자들도 이 문장을 읽으며 저와 같이 고민하다가 읽기를 포기할까 봐 모든 문화는 [어떤 목적에] 무관심하다.”라고 역자 주를 넣었습니다.

 

이 책 안에는 여러 가지 짧은 성찰들이 연결되어 있어요. 그중 신부님이 특별히 애정하는 문장이 있다면 그 이유와 함께 소개해 주세요.

표현의 역설이 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부각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 역설이 있다.”(43)

역설은 생각 속에 존재하기에 앞서 현실 어디에든 존재하기 때문이다.”(28)

철학이나 신학을 위해서는 성찰(생각, 사유)이 필수적이고, 이 성찰을 글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저는 역설이 바로 이 표현 작업에서 생겨난다고 자주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이 문장은 제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생각 이전에 실재 자체가 역설임을 가르쳐 준 거예요. 신앙의 표현이 역설이지만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실재가 역설임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역설들》에서는 책, 성경 말씀, 학자들의 연구가 많이 인용됩니다. 혹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이 책에서 드 뤼박이 자주 인용하는 파스칼의 《팡세》는 문학적으로나 사상적 측면에서 훌륭한 작품입니다. 아쉽게도 드 뤼박의 작품 가운데서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한 권밖에 없습니다. 십여 년 전 우리 신학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 퍼져 있는 그릇된 신심주의와 신비주의를 식별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저는 드 뤼박의 글들을 모아 편역한 《그리스도교 신비사상과 인간》(2014,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특성을 알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유익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담긴 역설과 앙리 드 뤼박의 신학적 성찰이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드 뤼박의 역설에 대한 신학적 통찰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첫 번째와 관련하여, 우리의 신앙 내용은 역설입니다. 하느님, 인간, 교회가 모두 역설적 실재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내용이 신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 뤼박은 이 신비를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이 신비는 아직은 감추어진 신비로 머물지만 언젠가 그 의미가 드러나며 완성될 것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신앙의 역설성은 그 신비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우선 역설을 거부하지 않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역설로 표현되는 서로 대립하는 요소들 가운데 일면만을 취해거나, 대립하는 부분을 분리해서도 안 됩니다. 역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역설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한 바로 그 실재, 신비적 실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진리로 드러나는 것을 희망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신앙의 신비는 반()-이성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성적 영역을 넘어서는 초()-이성적인 것입니다.

 

독자들이 역설에 대한 통찰을 읽어 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고 느낄 것 같아요. 이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조언 부탁드려요.

이 책은 쉽게 읽히지 않을 것입니다. 진리는 저항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깊이 파고드는 것처럼,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시간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읽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것을 발견하면 잠시 머물러 곱씹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각자 그리스도교 신앙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개혁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를 재발견하려는 노력도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71)

 

마지막으로, 《역설들》을 통해 앙리 드 뤼박을 처음 접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실까요?

흔히 열심인 분들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것이나 신비적인 것을 찾아다닙니다. 또한 감성적이고 달콤한 것, 쉬운 것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신앙의 내용보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실천법에만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의 실천은 그 내용에서 나와야 합니다. 정통한 교회의 교리(정교)에서 나오는 올바른 실천(정행)이 유지되어야 해요. 때로는 그 내용이 어렵더라도 곰곰이 생각하고, 그 영성적 깊이를 생각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관점을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그리고 하느님의 관점으로 나와 타인, 세상을 달리 보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틀을 부수고’, 그럼으로써 내 생각이 변하고 삶이 변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근본 신앙입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를 재발견하도록 도우며, 그리스도교 신앙 영성의 근본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그 깊이를 깨닫고 살아가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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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삶의 영감을 주는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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